4. 계획된 애처로움 vs 아이구 리틀솔져 둥기둥기
토니와 같이 잘 수 있는 권한, 아니 권리, 아니아니 특혜? 특권을 얻게 된것은 생각보다 쉬웠고 신속했으나, 스티브는 다음 난관에 부딪히게 됨. 그것은 바로 불규칙적인 토니의 수면습관이었음. 물론 어떨때는 아주 놀라울 정도로 철저하게 아침에 기상하고 하루종일 움직이고 나서 평범하게 잠드는 날도 있었음. 그러나 그건 아주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평소엔 랩에 틀어박히거나 이것저것 하다가 그대로 거기서 기절하거나 혹은 소파에서 아이디어 궁리하다가 잠들거나 하는 경우가 대다수였음. 그 전에는 자기 방에서 자느라 몰랐던 스티브도 토니의 그런 수면행동패턴을 알고 나서 혀를 내둘렀음. 왜 그렇게 힘들게 자나? 한 번은 물어봤음. 너무 궁금해서. 그랬더니 토니의 대답이 걸작임. 시간이 아깝잖아, 자는 시간은 진짜 비생산적이라고. 하나라도 뭘 더 생각하는 게 낫지. 누가 세기의 천재이자 공돌이 아니랄까봐 남들과는 무척 달랐음. 사실 스티브는 이거에 대해 관여할 수 없었고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었음. 그러나 관여해야만 했던 것이, 토니 스타크가 옆에 있어야 잠이 왔기 때문이었음.  


처음엔 일단 토니의 방이고, 언제든 토니가 돌아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걸로 잠을 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음. 그 예상이 아예 빗나가지는 않아서, 혼자 방에 있을 때보다는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한두시간 정도는 눈을 붙이는 게 가능했음. 대체 토니의 무엇이 그렇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침대 위에 널부러져있는 나이트 가운만 봐도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음. 나 이외의 누군가가 있다는 그런 안도감. 하지만 하루이틀사흘나흘닷새가 지나며 토니가 점점 침실에 오는 횟수가 뜸해지고 종내엔 사흘이상 철야를 하며 작업에 몰두하는 동안 스티브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만 했음. 이게 뭐임? 사람이 기껏 어려운 부탁(그것도 상당히 애매하고 곤란하고 미묘한)을 해가지고 성공을 거뒀더니 정작 중요한 장본인이 없어서 잠을 못잔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결과는 캡틴 스티브 로저스의 수첩엔 없었음. 게다가 이쯤되니 토니가 불편해서 일부러 잠을 안 자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음. 틀린건 아니었지만 최근 토니는 합금의 한계를 가지고 이것저것 실험하는 중이라 더 바쁘기도 했었음. 스티브가 있고없고 불편하고 아니고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단 말임. 그러거나 말거나 사정을 모르는 스티브로서는 넘어야 할 산이 나타난 것이었으며, 오냐 그럼 내가 넘어주마 롸져댓 하고 척척 나아가기로 결정하게 되었음.


사실 같이 잘 수 있게 유도하는 부분이 제일 어려웠으므로 그 외엔 다 하찮게 보였음. 스티브는 늦은 밤 푸른 곰돌이 파자마를 입고 토니의 랩실에 기웃거렸음. 자비스가 센스있게 문을 열어주자 오늘따라 조금 조용한 랩실 가운데에 잔뜩 화면을 띄워두고 생각에 잠긴 토니가 서 있었음. 어딘가 꿈 속을 유영하는 듯한 푸른 색의 화면들과 불빛들, 침묵에 휩싸인 채 무언가를 고민하는 옆모습은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 같았음. 스티브는 어쩐지 그게 싫어서 평소보다 조금 조급하게 말하고 말았음. 토니.... 약간 갈라진 듯한 목소리에 스스로가 놀라서 입을 꾹 다물자 토니가 등을 돌려 이쪽을 보았음. 어라, 이게 누구야. 캡이잖아?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 짖궃은 말투완 달리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을 띈 토니는 어딘가 굉장히, 편안해보였음. 스티브는 잠시 그 모습에 매료되어 있다가 금방 정신을 차리고 눈을 슬쩍 비볐음. 아니.... 자네가 통 잠을 자는 것 같지 않길래.. 걱정되서. 조근조근하고 나직한 스티브의 목소리에 토니는 어쩐지 뜨끈한 시트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음.


오.. 디어 캡틴, 스윗하네. 조금 쉬었더니 그래도 아직 멀쩡해. 당신이야말로 안 자? 토니가 무심결에 응답하듯이 물은 마지막 문장을 스티브는 놓치지 않았음. 자려고 했는데... 잠이 안 와. 노력은 해 봤지만, 역시.. 그. 말을 다 끝맺지도 않고 안절부절하며 한숨을 푹 쉬는 스티브를 보고 토니는 왠지 자신도 같이 성급해지는 느낌이었음. 그거 뭐? 착실히 무덤을 파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다시 묻자, 스티브는 무척 망설이는 듯하더니 겨우겨우 느릿하게 대답을 건넸음. 그... 자네가 없어서, 못 자겠어... 도저히. 누가 들으면 이게 왠 꼬심 멘트인가요 아 40년대 구식 남자의 돌직구 나오나요~ 할만한 오해돋는 말이었지만 둘은 현재 다섯쨜 캡틴과 40대 플레이보이였음. 이렇다할 기류도 눈에 보이지 않거니와(직접적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으므로), 서로 전혀 그런 쪽으로 생각이 굴러가지 않기 때문에 다행히 파장은 그렇게 크지 않았음.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세간의 기준이고, 막상 그걸 듣는 토니는 입을 쩍 벌릴 정도의 충격이었음. 캡틴이, 지금 뭐라고 한거야? 나 없이 못 자겠다고? 맙소사 저 양반이 지금?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뭔가 받아치기 위해 시선을 딱 돌리자 거기엔... 푸른 곰돌이 잠옷을 입고 어쩔 줄 몰라하는 금발의 스티브 로저스가 있었음. 토니는 속으로 외쳤음. 안돼. 또 넘어갈 지경이야.


미안하네, 기껏 와서 자도 좋다고 허락해줬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군.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풀죽은 목소리가 뒤따라왔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토니의 시선을 쉽사리 마주하지 못하는 스티브의 모습에 토니는 스티브와 동거한 이래 몇 번째인지 모를 신을 부르짖었음. 아 신이여 젠장, 귀엽잖아. 저건 악마야! 천사가 아냐! 정신 차려 토니 스타크! 속으면 안돼! 뺨을 직접 때릴 수 없어 마음속으로 자신을 후려치며 애써 마음을 다잡고 내가 요새 바쁘니 어쩔 수 없지, 수면제라도 줄까 하는 말을 꺼내려던 토니는 마침 눈치를 살피듯 고개를 들어올린 스티브와 정면으로 눈이 뙇 마주쳤음. 푸른 눈동자에는 약간 물기마저 어려 있었음. 지저스, 이건 여자뿐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존재로 하여금 모성애? 부성애? 아무튼 그 비스무리한 무언가를 단숨에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비주얼 효과였음.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옆에서 같이 자달라는 건데 그걸 못 들어주면 내가 천하의 몹쓸 놈이 될 것 같았음. 어라 이거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데. 토니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다가 결국 이번에도 입술이 먼저 움직이는 걸 막을 수 없었음. 어.. 음. 알았어, 오늘은 이만 올라갈테니 같이 가지 뭐. 그러자 스티브의 얼굴에 대번에 미소가 떠올랐음. 정말인가..? 나 때문에 일부러 그러는 거라면... 안 그래도.. 미안한 듯, 하지만 그래도 기쁨이 더 큰 듯 빙긋이 웃고 있는 스티브란 상당한 비주얼 쓰나미였음. 토니가 얼빠인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기실 이건 세상 사람들 전부가 그럴 거였음. (토니는 콜슨도 얼빠일거라 확신했음) 거기다 푸른 곰돌이 잠옷의 귀여움, 작은 체구까지.. 애처로움이라는 스파이시가 더해져 완벽한 매력 삼종세트를 완성하고 있었음. 토니는 어쩐지 자기가 낚이고 있다는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면서도, 수줍은 듯 손을 내밀어온 스티브를 뿌리칠 수가 없었음. 나 왠지 망하고 있는 것 같아, 페퍼. 무지하게.


그날부터 토니는 반강제적이지만 규칙적으로 잠을 자기 시작했음. 회사일이든 작업이든, 해가 떠있는 중천이거나 꼭두새벽에 일어나 처리하게 되었고 늦어도 열두시쯤엔 침실로 돌아와 잠을 청하곤 함. 이게 다 스티브 때문이었는데, 어느날은 한 이틀정도 새벽 2시를 넘겨 방으로 돌아왔는데 무척 쓸쓸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있는 (그것도 무릎을 모아 안은 채로) 스티브를 발견한 토니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런 천하의 몹쓸 인간을 보았나 저렇게 어린 애를 늦게까지 기다리게 하다니!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음. 게다가 스티브는 그런식으로 토니를 신경쓰게 해서 미안하다며 오히려 눈치를 보고 있는 거임. 맙소사 진짜 이게 뭐야. 토니는 진저리치며 늦어도 12시라는 데드라인을 스스로 정할 수 밖에 없었음. 샤워를 끝내고 와서 털썩 드러누우면, 바로 가까이에서 스티브도 시트를 덮고 누웠음. 잘 자게 토니. 굿나잇 리틀 솔져. 서로에게 여상히 인사를 건네고 나면 그 다음엔 고른 숨소리만 남게 되었음. 보통 먼저 잠드는 것은 스티브였고 토니는 그런 스티브를 잠깐동안 바라보다 눈을 감는 일이 다반사였음.


그렇게 슬슬 스티브와 규칙적인 수면을 취하게 된 토니는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수준으로 연달아 찾아왔던 멘붕(같이 자고 싶네 + 자네가 없으면 잠이 안와서 2단콤보)을 서서히 극복해나갔고 이제 옆에 새근새근 잠든 금발이 없으면 심심하고 이상한 기분이 될 무렵 조금 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음. 난 천재 조만장자 플레이보이 자선사업가인데! 토니 스타크인데! 끝내주는 남자인데! 왜 이렇게 리틀 솔져한테 쩔쩔매고 있는거지? 싶은거임. 본인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크게 양보하면서까지 부탁을 들어줘서 스티브와 사이가 꽤 좋아지고 서로에게 상당히 익숙해진 것은 무척 축하할만한 일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은근슬쩍 고개를 들기 시작한 거였음. 내가 이렇게 잘 해주는데 뭔가 리틀솔져를 그만큼 낚을게 없을까, 싶기도 하고. 이것저것 궁리하던 토니는 최근 스티브가 자신에게 몹시 효과적으로 외견적인 부분을 써먹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냈음. 오호라, 그게 있구만.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요렇게 나와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토니의 입가에 모처럼 짖궂은 미소가 걸렸음. 


신체가 어린애로 돌아간다는 건 불편함도 많지만 여러모로 전략적인 쓸모가 있기에 좋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스티브는 그 까다롭고 비협조적이며 시니컬하고 개인적인 토니 스타크를 두 번이나 함락시키는 데에 자신의 다섯살짜리 외모를 이용했고, 그건 아직도 쭉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간혹 이런 일들이 조금 더 빨리 있었더라면 자신들의 관계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 스티브 로저스는 약 한 시간째 책장과 분투하며 인내심이 슬슬 끊어져 가려는 참이었다. 하필이면 의자가 부서져서 쓸 수 없다니. 기나긴 책장과의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되고 말았던 것이다. 


"조금만.... 더...."

다시금 까치발을 하며 손을 뻗어 보았지만 아슬아슬하게 책 모서리에 손이 닿을락말락한가 싶더니 쭉 미끄러졌다. 타고 올라가는 방법도 고민해 보았지만, 수퍼솔져인 자신이 그랬다간 책장이 보기 좋게 넘어질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최악의 경우엔 그 아래 깔릴 수도 있고. 지친 숨을 내쉬며 스티브는 어깨를 풀듯 몇 번 위아래로 움직였다. 지금 꼭 읽어야 하는 미술 서적이 저 위치에 있는 게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을지. 가정법은 달콤하지만 결국 씁쓸한 현실을 강조해서 보여줄 뿐 아무것도 바꿔주지 않는다. 스티브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금 팔을 최대한으로 움직일 준비를 했다. 만약, 갑자기 위로 번쩍 들어올려지지 않았다면 스티브의 팔은 책장을 향해 뻗었을 것이다.

"헤이, 리틀 솔져. 뭐 하고 있는거야?"
".....아. 토니.. 깜짝 놀랐잖나."
"어차피 여기엔 나 말고 당신밖에 없구만 뭘 그리 놀랜대. 쉴드도 여긴 함부로 못 뚫어. 그나저나 뭐 했어?"
"음, 저기 책이 필요해서."

스티브는 자연스레 대답하며 토니를 돌아보았고 순간 숨을 멈추었다. 지척에 다가온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장난기와 약간의 따스함, 그리고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지금 자신이 애취급 당하며 번쩍 들어올려져 팔에 안긴 상태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스티브는 바보가 된 것 마냥 토니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전혀 질리지 않는 매력이 거기 있었다.

"의자가 부러졌어? 이런, 내가 바로 고쳐 주지. 책은 어느건데? 이쪽?"
"아니, 조금 더 오른쪽... 이거야."
"크기도 크네. 발돋움해서 꺼냈다간 대형참사가 발생했을지도 모르겠는데, 다음부터는 그냥 자비스를 통해서 날 불러."
"늘 바쁜 자네에게 폐를 끼치는 건 싫어서... 음. 알겠네."
"아직 리틀 솔져니까 그래도 돼."

토니는 일부러 '리틀' 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발음했고, 그제서야 스티브의 미간이 슬 찌푸려졌다. 본격적으로 항의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않아 있었으나, 지금껏 두 번이나 토니를 낚은 장본인으로서 도무지 그 부분을 확실하게 대응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게다가 어쩐지 이런 토니의 행동은 한 번으로 그칠 것 같지 않은 그런 예감이 들어 스티브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자업자득이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터였다. 또한 예상대로, 토니는 한동안 스티브가 뭔가를 찾기위해 끙끙대거나 피곤해하면 번쩍번쩍 안아들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스티브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이 아니라, 바로 코앞에서 토니를 응시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에 당황하고 조금은 기뻐했으며 그런 자신에게 놀라워했다.



by 치우타 2013. 3. 16. 2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