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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토니 스타크, 캡틴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다
첫날 스티브를 어디 재울데가 없어서 같이 잤지만 토니 방 바로 옆에 스티브가 있을만한 공간을 따로 마련해서 그 다음부터는 각자 자게 되었음. 토니는 스티브에게 캡, 무서우면 언제든지 내 방으로 와. 라며 농을 던졌고 스티브는 작은 얼굴에 인상을 쓰며 그럴일 없을 거네. 하고 성큼성큼.. 이라고는 해도 다섯살이니까 종종 걸어서 자기 방으로 돌아감. 동그란 뒤통수를 보며 키득거리던 토니는 이내 자기 할일을 시작함. 몸은 작아졌어도 속알맹이는 그대로라, 아침 일찍 일어나 토니에게 식사를 제때 해야 한다고 깨우고 틈틈이 작은 몸으로도 할 수 있는 운동을 하는 스티브는 영락없는 캡틴이었음. 베이비 캡이 됐어도 진짜 그대로네, 그대로야. 토니는 일주일째 아침식사를 꼬박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음. 식사는 모든 일의 기본이야. 오믈렛을 떠먹으며 스티브가 태평스레 말했음.
일찍 일어나지만 아침은 늘상 대충 먹거나 거르던 토니로 하여금 꼬박 세끼를 다 챙겨먹도록 하는 데에 성공하며 기쁨을 느끼던 스티브에게 어느 날, 몸이 작아지고 나서 처음으로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발생했음. 그건 바로 최근 잦아진 천둥번개와 시끄럽게 창문을 때려대는 빗줄기였음. 저건 날씨일 뿐이고,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으며, 심지어 자신은 저런 것에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강함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뇌었지만 결국 밤새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음. 그게 한 삼일쯤 계속되자 스티브의 반짝반짝하던 얼굴엔 다크서클이 내려앉기 시작했고, 토니와 밥을 먹으며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음. 어이 캡틴, 그러다 오트밀 그릇에 코 박고 기절하겠어. 놀림과 걱정의 기색이 반반 담긴 토니의 말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스티브를 보고 토니는 속으로 혀를 찼음. 왜 저런대. 이유를 물어봐도 말 안하고 괜찮네. 별거 아니야. 하는 대답만 돌아오니 신경이 오히려 더 쓰였음. 자비스, 요 며칠 캡이 왜 저러는지 알아야겠으니까 오늘은 잘 때 뭐하나 녹화해둬.
스티브가 나흘 째 불면의 밤을 보내며 시트를 뒤집어쓰고 뒤척이다가 불을 껐다가 켰다가 일어났다가 앉았다가 서성였다가 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자비스를 통해 녹화되었음. 문고리를 몇 번이고 잡았다가 놓는 모습도 있었음. 토니는 손에 든 스패너를 빙글빙글 돌렸음. 저거 불면증인 것 같은데, 이유가 뭔지 모르겠네. 어둠을 무서워하는 것 같지는 않고.. 토니는 나흘간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았음. 그러다가 문득 영상 속에서 스티브가 눈에 띄게 움찔거릴 때가 있다는 걸 발견했음. 자비스, 거기 다시 재생해봐. 캡이.. 그렇지. 아까 그 20분 즈음의 것도. 몇 번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보자 원인이 뭔지 드디어 파악할 수 있었음. 번쩍거리는 번개, 그리고 우르릉거리는 천둥이었음. 창가 근처에 안 있으려고 하는 걸 보면 빗소리도 그닥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음. 세상에, 캡틴 아메리카가 뇌우 때문에 나흘씩이나 잠을 설쳤다는 거야? 역시 애 취급하는 게 유효했던 거구만 뭘... 토니는 으이구 한심 하는 표정을 지으며 회로기판과 스패너를 내려놓았음. 저걸 알아낸 건 좋은데 그 양반 자존심을 생각하면 자기가 알아서 찾아올 것 같지도 않고... 이걸 어쩐다. 고전적인 방법이라도 좀 써먹든지 해야겠는데? 이 토니 스타크를 여기까지 신경쓰게 하다니. 돌아오면 톡톡히 받아낼거야.
일단 토니는 천천히 준비를 시작했음. 스티브의 방 환경을 뇌우가 아주 잘 들리도록 하고, 번개가 더 잘 보이게 반사각도를 바꾸기도 했음. 그리고 그날 저녁, 같이 밥을 먹는데 텔레비젼에서 최근 날씨가 험악하여 많은 주민들이 불면증 등 여러 피해에 시달리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음. 그걸 보며 토니가 어깨를 으쓱였음. 요새 데미갓 양반이 기분이라도 좋은 모양이지. 아주 매일같이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잖아. 나는 섬세해서 저렇게 소란스러우면 잠 설친다고. 그 말을 들은 스티브는 고개를 번쩍 들고 눈을 깜박이며 토니를 응시했음. 자네도.. 잠을 못 자나? 말도 마, 피곤해. 손을 저으며 질렸다는 듯 투덜거리는 토니를 보고 스티브는 자기도 모르게 씩 웃었음. 작아져서 위협을 느끼는게 아니었어, 그냥 다들 시끄러워서 그러는 것 뿐이야. 뭔가를 확인받은 사람처럼 화색이 도는 얼굴을 한 스티브를 보며 토니는 속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음. 당신도 못 자는거야? 그러면 내 방으로 오던가. 혼자보단 둘이 낫거든, 이럴땐. 대충 흘리듯 던지자 스티브는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음. 자기가 처음에 '자네도' 라는 말을 했다는 건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음. 아이구 요 캡틴 보게. 은근히 귀여운 면도 있고. 세상 오래살아봐야 안다니까. 노인네 같은 생각을 하며 토니는 픽 웃었음.
밤이 되자 둘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음. 잘 자게, 토니.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토니는 손을 흔들었음. 잘자 캡틴. 그리고 금방 봐. 토니는 뒷 인사를 마음 속으로 던지며 방에 돌아가 깨끗하게 샤워부터 했음. 물을 맞으면서 진짜 별짓 다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음. 내가 진짜 뭐하고 있대? 캡을 맡은거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거고, 첫날에 같이 재운거야 잘 데가 없어서 그런거고... 오늘은 뭐 불면증까지 도와주고 앉았담. 천재, 플레이보이, 자선사업가... 자선사업을 하는 건가? 솔직히 토니 자신도 이유를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곤란했음. 그냥 신경도 엄청 쓰이긴 하지만, 선샤인한 외모를 해가지고 눈가에 다크서클을 달고 있는걸 보니 괜시리 짠한 기분이 들었음. 애 하나 키우는 셈치자 싶은 마음으로 맡았지만 막상 며칠동안 같이 있다보니 캡은 꽤 괜찮은 사람이었음. 아니, 엄청 괜찮은 사람이었음. 물론 고집도 세고 자기생각도 확실하고 여러모로 부딪치는 면이 많기는 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는 참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내가 왜 여기까지 하나. 고민하던 토니는 기왕 저질렀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샤워기를 끄고 가운을 집어입었음. 뭐 어때 하고싶으니까 하는 거지. 인생은 그런 거야. 대충 자기합리화를 하며 나오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밖에서 뇌우가 몰아쳤음. 우르르릉콰과과광!!! 평소보다 배는 큰 느낌이었음. 어라, 이거.... 예상밖의 일에 미간을 찌푸린 토니의 귀에, 구르는 듯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문이 콰당 열렸음.
토니는 문가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별로 멀지도 않은 거리를 달려왔는지, 파란 곰돌이 잠옷을 입고 숨을 헐떡이는 스티브가 있었다.
밝은 금발은 어두운 방 안에서도 반짝이고 있어서 눈에 잘 띄었는데 오늘은 늘 잔잔하던 푸른 눈동자에 두려움을 가득 담고 있어 순간 정말 어린애로 착각할 정도였다.
"캡틴? 무슨 일이야?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토니."
숨을 진정시키느라 한 템포 늦게 들려온 대답은 그저 자신의 이름 한 글자였다. 토니는 머리를 털던 수건을 의자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으며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스티브의 늘 당당하고 곧게 펴 있던 어깨는 움츠러들어 작게 떨고 있었고, 뭐가 그리 두려운지 입술을 연신 깨물며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보는 사람마저 불안하게 만드는 그 모습에 토니는 어쩐지 놀릴 마음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후에 토니는 이것을 아주 현명한 마음 속 결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잠깐, 당신 떨고 있잖아. 추운거 아니야? 열 나나? 이리 와봐."
"...열은 아니야. 그냥...."
"그냥 뭐?"
스티브가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려던 순간, 창 밖으로 다시 한 번 크게 뇌우가 울려퍼졌다. 어찌나 시끄럽던지 이번엔 토니도 귀를 막아야 할 정도였다.
이것까지는 내가 연출하려던 게 아닌데. 토르가 진짜 무슨 일이 있나 까지 생각하던 토니의 품에 작은 몸이 급작스레 달려들었고, 억 하는 짧은 신음과 함께 침대 위로 쓰러졌다.
혼신을 다한 보디 어택을 맞은 터라 배가 얼얼했지만 꽉 달라붙은 스티브의 몸이 너무 심하게 떨고 있어서 아무런 불평도 할 수 없었다.
"헤이... 이봐, 스티브. 괜찮아. 고개 좀 들어 봐."
"........"
"리틀 솔져, 고개 좀 들어보라니까."
차분하게 달래는 어투로 말하며 등을 쓰다듬자, 그제서야 스티브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푸른 눈동자에는 약간의 물기가 찬 채로 그렁그렁한 상태였고 몸은 여전히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이거 내가 너무 심했나.. 불면증을 고쳐줄 겸 놀려줄 겸해서 시작했는데 이런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기에 토니는 뺨을 긁적였다.
"난... 나는 무서운 게 아니야.."
"알아, 캡틴. 그냥 너무 시끄러워서 놀란 거잖아. 그렇지?"
".......응."
자신도 모르게 아이처럼 대답한 스티브는 곧 소스라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만 도리질해, 두통 오겠다. 토니는 손으로 가볍게 스티브의 머리를 잡아주었다.
"이럴때는 말이지, 저런 소리에 굴하지 않도록 좋은 생각을 하면 돼."
"....좋은 생각?"
"좀 고전인데 당신이 알지는 모르겠네. 들어보겠어?"
평소처럼 비웃는듯한 미소가 아니라 부드럽게 웃는 토니의 얼굴을 보며 스티브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여전히 토니의 가슴팍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잊어버린 것 같았다.
Raindrops on roses and whiskers on kittens 장비에 떨어지는 빗방울과 아기고양이의 수염
Bright copper kettles and warm woolen mittens 밝은 주전자들과 따스한 장갑
Brown paper packages tied up with strings 끈으로 잘 묶인 갈색의 꾸러미들
These are a few of my favorite things 이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지
듣기 좋은 토니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려퍼졌음. 스티브는 아직도 토니의 옷자락을 꽉 잡고 매달린 채 가만히 그 노래를 들었음.
Cream colored ponies and crisp apple strudels 크림색 조랑말과 바삭한 사과 슈트루델
Doorbells and slaybells and schnitzel with noodles 초인종과 종들 그리고 슈니첼과 먹는 국수
Wild geese that fly with the moon on their wings 달과 함께 날아가는 야생 거위들
These are a few of my favorite things 이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지
When the dog bites, when the bee stings, when I'm feeling sad 개에게 물리고, 벌에게 쏘이고, 내가 슬플 때
I simply remember my favorite things and then I don't feel so bad 난 간단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지 그러면 기분이 좋아져
토니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바깥의 시끄러운 빗소리나 천둥번개는 하나도 신경쓰이지 않았음. 스티브는 마법처럼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토니가 말릴 새도 없이 그대로 품에 안긴 채 소록소록 잠이 들었음. 반사적으로 스티브의 등을 토닥이고 있던 토니는 갑자기 찾아든 정적에 슬그머니 가슴팍을 내려다보았고, 거기엔 세상 모르고 잠든 스티브가 있었음. 움직이면 깨는거 아닌가 싶어 함부로 움직이기도 힘든 자세로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토니는 랩실의 작업화면을 자비스더러 끄라고 일렀음. 이것도 어쩌면 자업자득인가? 헛웃음을 지으며 토니는 시트를 끌어올렸음. 다섯살인데 생각보다 무겁네. 기대온 체온은 첫날 같이 잠들때처럼 따스했고 덕분에 잠이 몰려오는 느낌이었음. 어쩐지 이거 습관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며 그대로 꿈 없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음.
다음날 아침, 뭔가 간질간질한 느낌에 토니가 눈을 번쩍 떴음. 차창 밖으로는 천천히 해가 떠오르고 있었고 자비스가 아침 알람을 일상적으로 시작하는 중이었음. 아, 잘 잤다. 어쩐지 간만에 숙면한 기분인데... 근데 뭐가 이리 무거워. 문득 고개를 내리자 완전 착 달라붙어서 꿈 속을 헤메고 계시는 스티브 로저스가 땋, 시선에 들어왔음. 무슨 구명줄이라도 잡고 있는 것마냥 토니를 한껏 끌어안은 채 색색 숨을 내쉬며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음. 어제 불러준 자장가 겸사겸사한 노래가 그렇게 좋았나? 토니는 허 하고 웃으며 조심스럽게 스티브의 팔을 떼어냈음. 그런데 이게 왠걸, 한쪽 팔을 떼어내자마자 스티브는 뭔가 불만인 듯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더 찰싹 달라붙어오는 것이었음. 어이 이보세요 리틀 솔져씨, 왜 이러세요.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기겁하며 토니가 다시 시도했지만 쪼그만한 주제에 뭔 힘이 그렇게 센지 떼려고 하면 할수록 더 파고들어왔음. 애기들의 본능 발동 같은 느낌임. 따끈하니 좋은데 그게 멀어지니까 싫은 것 같았음. 아이고... 내가 자장가도 모자라서 인간 곰인형도 해줘야 되냐... 몇 번을 도망치려고 애쓰던 토니는 스티브의 집요함에 두손 들고 항복했음. 자기중심적인 토니였지만 은근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겐 꽤나 약한 면이 있었음. 아닌척하느라 일부러 재수없게 굴고 정떨어지게 굴기도 하는데 그걸 잘 캐치해내는 사람들이 있음. 로디 페퍼 해피 이런 사람들. 스티브랑은 아직 그렇게 친하진 않아도 전장을 헤친 전우이며 동료이며 이렇게 지내다 보니 어영부영 가까워진 점도 없지 않았음. 알게모르게 잔정 많은 토니 스타크를 붙드는 방법을, 스티브 로저스는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거였음. 자고 있으니까 내가 봐줬다. 토니는 투덜거리며 누워서 패널을 만지작거렸음. 스티브가 깨어날 때까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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