퀼은 잔뜩 구겨진 얼굴로 스타크 타워 옥상에 서 있었다. 방해꾼들(이라고 쓰고 어벤져스 멤버들이라고 읽는다)이 뜸해져서 한창 토니와 깨소금을 뿌리고 있었는데, 가모라로부터 급하게 연락이 들어온 것이다. 타노스의 부하들이 또 뭔가 벌이고 있다는 증거를 잡았으니 가능한한 빨리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노련한 연상 애인과 즐기는 시간은 무척 중요했지만, 그가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의 부름도 마찬가지로 중요했다.

"조심해서 다녀와.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그러면-"
"무슨 일 없어도 연락하고, 물론. 당연한 거 아니야?"
"이래서 당신이 좋아요. 토니."

 바보처럼 헤실거리며 다시 꽉 끌어안아오는 퀼의 등을 토니가 부드럽게 토닥였다. 토니도 이런 식의 짤막한 이별에 익숙한 타입은 아니었으나 이 연하 애인은 더 그랬다. 처음엔 쿨이니 뭐니 센 척도 하고 온동네 휘젓고 다니는 어설픈 플레이보이였지만, 막상 사귀기 시작하자 넘치는 애교에 스킨쉽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특히 퀼은 이런 식으로 잠깐 우주에 돌아가야 할 때, 탑승 직전까지 토니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질 않았다. 애정을 갈구하고 사람의 체온을 좋아하는 모습이 어쩐지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게 했다. 씁쓸함 반 사랑스러움 반으로 가만히 안아 달래면 도리어 더 품에 파고들어오는데 도무지 당할 도리가 없었다. 넌 나보다 훨씬 솔직해. 그래서 귀여워. 토니는 퀼의 뺨에 키스했다.

"저기 왔네. 이제 가야지, ."
"가끔 이럴땐 매정한 것 같기도 하고..."
"매정하다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가 알고 싶다면 돌아왔을 때를 기대해 봐."
"아니, 아니, 잘못했어요. 취소. 다녀올게요, 토니."

 바람 피우지 마요. 장난스럽게 덧붙이며 윙크를 날린 퀼이 우주선에 올라탔다. 저게 진짜 귀엽게 노네. 토니는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우주선이 빠르게 멀어졌다. 


 이틀 후, 토니는 갑작스럽게 스티브의 방문을 받았다. 마침 그는 회사 일정도 없어서 오래된 연구 자료를 정리하거나 새로운 방화벽 프로그램을 구상 중이었다. 랩실의 문이 열리고 가죽 자켓에 면 티셔츠, 청바지를 걸친 스티브가 들어오는 걸 보며 토니는 휘파람을 불었다.

"와우, 캡틴. 복장이 제법 괜찮아졌네. 이제 적응 좀 됐나봐."
".. 어울리나? 잠복근무를 몇 번 하다보니 편안하고 눈에 띄지 않는 옷을 입게 됐거든."
"그 가죽자켓이 정말 좋군. 색도 그렇고, 딱이야. 그런데 무슨 일로?"

 토니는 띄워두었던 창을 옆으로 치우며 스티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어쩐지 묘한 기분에 시선을 스윽 위로 굴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스티브는 희미하게 미소짓더니 뭔가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이 노친네가 왜 이러지?

", .. 혹시 오늘 자네 시간이 있나?"
"시간? 무슨 시간?"
"사실은... 나타샤에게서 이런 걸 받았는데. 적응 훈련의 일환이라고."
"....미술관 티켓?"
"고리타분한 박물관 말고, 현대 미술도 좀 보고 오라더군. 칙칙하게 혼자 가진 말라면서 두 장을 받았네만.. 같이 갈 만한 사람이 없어서."

 스티브는 멋쩍은 웃음을 입가에 띄우며 고개를 들었다. 자네는 아주 바쁜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혹시 괜찮다면.. 덧붙이는 말은 캡틴 아메리카 답지 않게 작은 목소리라서 하마터면 내용을 놓칠 뻔했다. 토니는 습관적으로 팔짱을 끼며 스티브의 손에 들린 티켓과 어쩔줄 모르고 서 있는 스티브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 괜찮겠지. 미술관 정도야.


by 치우타 2015. 1. 19. 21:57

 스티브를 포함한 어벤져스 멤버들이 타워로 입주한 이후, 퀼은 어쩐지 알게모르게 토니와의 시간을 방해받는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의외로 첫 스타트는 배너 박사였는데 토니와 연구니 뭐니 대화를 나누더니만 둘이 랩실에 콕 틀어박혀서 도무지 나올 줄을 몰랐다. 

 직접 찾아가서 은근히 나 외롭다는 뉘앙스의 말을 던져도 보았지만(배너는 다행히도 남 일에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토니는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 퀼. 오래 안 걸릴 거야." 라는 말과 함께 그의 엉덩이를 토닥여 주고는 다시 홀로그램 화면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대실패였다! 

 보통 퀼은 여유를 가질 줄 아는 쾌남이지만, 이렇게 진심으로 대하는 상대로부터 이틀 이상 떨어져 있는 건 제법 괴로운 경험이었다. 그것도 같은 집에 있으면서. 사흘째 되는 저녁에 맛있는 샴페인과 음식을 가지고 마침내 토니가 그에게 돌아왔을 때, 퀼은 반쯤 풀죽은 얼굴을 한 채 시무룩한 상태로 소파에 드러누워 있었다. 

"헤이, 스위티. 왜 그렇게 널부러져 있어?"
"버림받은 강아지의 기분을 느껴보는 중이에요."
"음, 그래서 어떤데?"
"쓸쓸하고 외롭고.... 혼자인 기분이 드네요."
"그 동안 일을 다 미루고 있어서 그랬어. 이틀 반만에 끝낸 것도 너 때문이고."
".....진짜로?"
"정말로."

 토니가 웃으며 퀼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눈가엔 애정이 담겨 있어서, 퀼은 며칠간의 서운함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오늘밤은 안 놔줄건데." 팔을 잡아 끌어당기며 속삭이자 토니는 푸스스 웃었다. "언제는 놔 줬었나 뭐. 살살해. 내 나이를 생각하라고."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입술이 맞딯았다.

 그렇게 다시 달콤한 시간을 보내나 했더니 이번엔 나타샤가 토니를 찾아왔다. 정보를 우회해서 빼낼 때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알려달라는 거였는데, 토니는몇 가지 쓸모있는 기술을 그녀에게 가르쳤다. 예전같았다면 붉은 머리에 섹시한 스파이인 그녀가 퀼의 취향에 스트라이크 존이었겠지만, 지금은 토니 말곤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거와 별개로 눈은 즐거웠지만. (헤실대는 퀼을 토니가 매섭게 째려보았다)

"고마워요, 스타크. 이건 정말 유용하겠어."
"내 뒤통수 치는데엔 쓰지 마. 당신은 너무 똑똑해서 더 이상 안 가르쳐 줄 거야."

 토니가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유쾌하게 던지자, 나타샤는 의미심장하게 씩 웃어보였다.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퀼은 토니 근처를 맴돌며 대화를 엿들었지만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다음 날에는 호크아이, 바튼 요원이 무기 제작에 관한 요청을 하러 찾아왔다. 매서운 눈매를 가진 그가 처음 홀에 들어섰을 때 퀼은 무척 긴장했지만(이사할 당시 그는 임무 중이라 자리에 없었다), 토니를 보자마자 반갑게 풀어지는 걸 보며 안도함과 동시에 새로운 도전자의 등장인지를 바쁘게 계산해 보았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로마노프 요원이랑 둘이 사귀는 사이일걸."
"어? 그래요?"
"둘 다 아닌 척 하지만 말이야."

 퀼은 어깨에 힘을 빼며 토니의 허리에 매달렸다. "난 또 뭔가 했어요. 그 사람이 당신한테 너무 호의적이라.." 토니가 즐거운 듯이 낄낄 웃었다. "매 요원은 내 오랜 팬이거든." 

 희안하게도 퀼이 가장 경계하며 걱정하던 도전자이자 방해자인 스티브는 일주일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내 기우였나? 그는 간지럽다며 밀어내는 토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잡생각을 떨쳐냈다.

by 치우타 2015. 1. 16. 01:18

 파티는 소박한 규모에 비해 제법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아스가르드에 있는 토르를 제외한 전 어벤져스 멤버가 타워로 이사온 걸 축하하며, 겸사겸사 우주에서 온 퀼(스타로드라는 호칭을 듣고 다들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말했으며, 스티브만이 애매한 표정으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과 인사를 나눴다. 파티 내내 퀼은 토니 옆에서 떠날줄을 몰랐고, 적당한 너스레와 유치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자정이 조금 못 되어 파티가 끝나자 다들 각자의 층으로 돌아갔다. 스티브는 퀼이 잠시 로켓의 연락을 받는 사이에 토니와 뭔가 대화를 나누고는 돌아갔다.

"무슨 이야기 했어요?"
"음? 아. 요새 하고 있다는 임무가 있대서."
"쉴드 기밀?"
"거긴 늘 그렇지."

 흐으음. 약간 불만스럽다는 듯 흥흥거리자 토니는 퀼의 콧잔둥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토니이. 코맹맹이 소리로 칭얼거리는 연하 애인은 요즘 들어 부쩍 질투도 심해지는 게 제법 귀여웠지만, 미리 컨트롤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귀찮은 일이 될 터였다. 

"쓸데없는 생각 자꾸 하면 난 잘거야."
"! 안 돼, 우리 일주일 만이잖아, 못 자요."
"그럼 빨리 와. 누구 때문에 술도 마음껏 안 마셨는데.."

 토니는 약간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퀼의 포옹을 풀고 침실로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른하면서도 섹시한 그 표정에 퀼은 등이 뜨끈하니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허둥지둥 쫓아가 다시 끌어안았다. 

"...밤 샐수 있어요?"
"언제는 안 새게 만든 것처럼 말한다, 너. ..흐응..아.."
"그럼 사정 안 봐줘도 되겠네."
"전처럼 온통 물어뜯진 마, 아프니까... 아, 사람 말 좀 들어! 이 바보가.. 윽, 흣..."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덥석 목덜미를 물어오는 이빨의 감촉에 토니가 타박하며 퀼의 등짝을 때렸다. 내 거야. 토니. 스티브에 대한 건 잊어버린 모양이지만 엉뚱하게 소유욕을 불태우는 모습에 토니는 픽 웃어버렸다. 내가 봐 주는 건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네. 

by 치우타 2015. 1. 16. 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