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로저스 - 캡틴 아메리카는 평생을 옳지 않은 것들과 싸워온 남자였다. 허약한 몸으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동네 깡패들을 그냥 놔두지 못했고, 수퍼솔져 세럼으로 새로 태어난 다음에는 동료들을 이끌며 하이드라와 맞섰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몸을 아끼지 않았던 그를 사람들은 존경했고, 추앙했으며 진정한 영웅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삶을, 평범한 일상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그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스티브는 늘 생각해왔다. 그렇기에 더욱 바르고 올곧은 모습을 가지는 것이 영웅의 자격이라고 믿었다. 토니 스타크를 만나기 전까지는.


 토니는 여러모로 그의 기준에서 한참 모자란, 혹은 벗어난 인물이었다. 철조망 위에 눕느니 그걸 잘라버리는게 낫다고 말하는 그는 무척 가벼워 보였고, 겉으로 보여지는 이미지에만 신경쓰는 일종의 Big man 같았다. 쇼맨쉽을 보여주는 그런 작자들처럼. 스티브는 처음부터 그와 날카롭게 충돌했고 서로를 상처입히는 말을 내뱉었다. 뉴욕에 쏘아진 핵미사일을 짊어지고 우주로 날아가는 토니의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얼마나 토니 스타크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렸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재단한 것이었다. 스티브는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모르는 만큼 토니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헤이, 캡! 내가 매력적인건 알겠지만 뒤를 보는게 좋겠어!"


 전투 중에 폭탄 해체라는 위험한 작업을 수행하면서도 토니는 여유롭게 스티브를 걱정해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폭탄은 빌런의 술수로 터지게 되었지만 공중에 높이 날아올라가서 처리하고 내려온 토니는 다치고 긁힌 아머 속에서도 개구진 웃음을 지어보였다. 스티브는 그 순간, 토니에게 사랑에 빠졌다. 정말 우습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미 벌어진 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당신이 날 왜 좋아하는지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어."

 "자네는 매력적이잖아. 귀엽고, 섹시하고.. 잘났지. 게다가 뻐기는 모습이 아주 사랑스러워."

 "오케이, 거기까지. 더 들으면 내가 닭이 되어버릴 것 같아."


 토니는 진저리를 치며 스티브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현대의 아이콘, 섬세하고 미래지향적인 남자. 토니 스타크는 이렇게 따뜻하고 또 누구보다도 영웅적인 사람이었다. 스티브는 팔 안의 기적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웃었다. 당신이 내 영웅이야, 토니. 속삭임에 귓가가 새빨개지는 토니를 보며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by 치우타 2015. 4. 4. 22:47

 스티브는 괜히 맞닿은 운동화의 코끝을 문질렀다. 지금이 몇 시더라. 조금 전 확인한 시계가 제대로 가고 있다면 이제 겨우 오후 네 시였다. 토니와 약속한 시간은 다섯 시였으나, 스티브는 설레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서두르다가 그만 한 시간 전에 공원에 도착하고 만 것이다. 가죽 자켓에 브이넥 티셔츠, 청바지에 운동화라는 지극히 평범한 옷차림으로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여기저기서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눈에 띄나? 스티브는 제 덩치와 외양을 생각하며 슬그머니 숲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평일 오후시간대여서 그런지 아이들이 제법 있었지만 대부분 잔디가 깔린 앞뜰에서 놀고 있었다.


 [스티브, 내일 오후 시간 있어? 다섯 시쯤.]

 "괜찮은데. 무슨 일인가?"

 [날씨도 좋으니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눈치없기는. 센트럴 파크에서 봐.]

 "센트럴 파크? 거긴 사람이 많을텐데.."

 [저녁엔 그렇지도 않아. 아무튼 내일 봐, 스위티.]


 보통은 스티브 쪽에서 비어있는 시간에 대해 물어보거나, 페퍼를 통해 토니의 스케줄을 듣고 미리 계획을 짜서 협의하는 정도였던 탓에 이런식으로 토니가 먼저 데이트를 요청해오는 것은 퍽 오랜만이었다. 덕분에 스티브는 전날 밤부터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뭘 입지, 꽃이라도 사가지고 갈까? 너무 시선을 끈다고 안 좋아하려나. 체크무늬 셔츠는 다 찢어버리겠다고 협박했었는데... 스티브는 거의 첫사랑과 데이트하는 소년 같았다. 그는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까지 했다. 벌써 진도는 다 뺀 연인 사이였지만 토니와 밖에서 만나는 건 언제고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아."


 숲길로 들어서자 조금씩 꽃망울을 수줍게 내민 색색의 꽃들이 보였다. 이제 여기에도 봄이 거의 다 왔군. 뉴욕은 겨울이 혹독하고 긴 편이라 점점 봄이 짧아지고 있다는 뉴스를 얼마 전에 봤었기에, 더욱 반가운 광경이었다. 스티브는 천천히 걸음을 늦추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무와, 꽃과, 바람의 내음이 폐 깊숙히까지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스티브?"


 순간 그는 우뚝 발을 멈췄다. 아직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인데. 생각하는 머리와는 다르게 이미 고개는 돌아가 상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토니?" 놀라다 못해 거의 얼이 나간 스티브의 표정을 보고 토니가 씩 웃었다. 개구진 미소였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약속 시간은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왜 이렇게 일찍 왔어?"

 "그러는.. 자네야말로. 어떻게, 여기.."

 "일이 조금 일찍 끝났거든. 변장할 시간이 없어서 일단 여기쯤 온 다음 연락하려고 했는데 익숙한 금발 글래머가...."

 

 토니는 히죽거리며 다가오더니 스티브의 팔이며 허리며 엉덩이(토니! 스티브가 작게 타박하곤 지지 않겠다는 듯 토니의 엉덩이를 만졌다)쪽을 쓰다듬었다. "와우, 탄탄해. 그리고 섹시해. 오늘 복장 정말 최고야. 고민 좀 했나봐?"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에는 장난기와 더불어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담겨져 있었다. 스티브는 그만 웃어버렸다.


 "자네가 체크무늬 셔츠를 찢겠다고 했잖아."

 "아주 좋아. 누가 쳐다보는 건 좀 질투나지만, 어쨌든 끝내줘."


 쪽 소리를 내며 부벼오는 입술에 응하며 스티브는 토니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내 얼굴이랑 몸만 목적인 모양인데.." 스티브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토니가 인상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어 왔다.


"뭐? 내 목적은 당연히 스티브 로저스지, 노친네야. 빨리 키스나 마저 해." 

"밖에선 조심해야 한다고 말할 땐 언제고?"

"봄이잖아, 스티브. 나도 봄에는 설렌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둔 꽃띠 처녀처럼... 응? 빨리."


 칭얼거리는 몸을 더욱 세게 품에 가두면서, 스티브는 벅찬 마음으로 기쁘게 토니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두 사람의 호흡과 심장소리 너머로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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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팁토니 전력 60분, '봄' 주제 연성. 테마곡은 Beatles - Till there was you. 

노래에 맞는 연성을 하려고 했는데 너무 늘어지고 재미도 없길래 그냥 뽀뽀나 시켰습니다. 


by 치우타 2015. 3. 28. 21:47

 세상 일 참 알다가도 모르는 일이야. 토니는 슬쩍 곁눈질로 옆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공교롭게도 상대방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속을 알 수 없는 푸른 색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아이 컨택에 토니는 내심 깜짝 놀랐지만, 태연한 표정으로 얼굴을 덮으며 입을 나불거릴 수 있었다. 스타크 가문의 놀라운 처세술에 건배.


 "흠. 그나저나 당신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런 곳에는 전혀..."

 "발도 안 디딜 것 같았어?"


 토니의 짖궂은 목소리에 남자, 스티브 로저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조용히 대답했다. "거의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과거보다는 미래를 보는 사람 아닌가? 자네는." 이번에야말로 토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우와, 세상에. 캡틴 팝시클이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놀랠 노 자네." 스티브의 얼굴에 떠오른 떨떠름한 표정을 보고 나서야 토니는 제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구 이놈의 입방정.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토니의 어린애 같은 행동에 스티브는 한숨을 쉬는 대신 작게 미소지었다. "내가 화석급이긴 하지만 죽진 않았어. 토니." 


 이어지는 달변에 막히는 것은 토니의 말문이었다. 어디 가서 말재주 없다는 소리 들어본 적 없는 천재로서(심지어 술 취한 채로 진행했던 연설에도 감동받은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이건 정말 초유의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양반이 오늘따라 혀에 기름칠이라도 했나 봐. 토니는 괜히 입술을 쭉 내밀고 흥흥거리며 스티브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제법 무례한 시선이었지만 오히려 스티브는 말 없이 그런 토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토니는 백기를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정말이지, 왜 이러는 거야. 캡틴. 폐장시간을 훌쩍 넘긴 스미소니언 박물관 앞은 아주 조용했고, 지나는 행인들도 하나 둘 점점 다른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늘 토니와 스티브는 공교롭게도 박물관이 문을 닫고 난 지 10분 후에 도착해서 우연한 만남에 아주 깜짝 놀라는 중이었다. 이런 건 일부러 하려고 해도 못하겠다. 토니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스티브와 시선을 마주했다. 말끔한 수트 차림인 그에 비해 스티브는 눈에 띄지 않는 가죽 자켓에 청바지,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당신 그거 완전히 너드 같아. 좀 귀엽기는 하지만." 


 아차. 오토코렉트 수준으로 나가버린 말에 당황할 틈도 없이 스티브가 씩 웃었다. 어? 


 "너드 같다는 말은 들어본 것 같은데, 귀엽다는 말은 처음이군."

 "어어.. 어... 응? 들어봤다고? 언제.. 아니 그보다, 당신, 웃었..."

 "그렇게 말하는 자네가 귀여워서." 


 헉. 토니는 완전히 입을 쩍 벌렸다. 신경써서 매만진 머리와 몸에 딱 맞는 최고급 수트, 세련된 이탈리아제 가죽구두가 놀랄 정도로 무방비한 행동이었다. 귀여워? 누가, 내가? 아니 캡틴, 스티브가? 귀엽다니. 대체 무슨 소리야? 토니의 옥타코어가 머릿속에서 정신없이 돌아가다가 연기를 내뿜으며 삑삑 경고음을 울려댔다. 미확인 정보를 수신할 수 없다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토니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눈 앞에는 여전히 스티브, 캡틴 아메리카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운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조금 전보다 거리가 가까워진 것만 같다. 토니는 다시 눈을 두 번 정도 깜박였다. 그래도 금발의 잘생긴 청년은 사라지지 않은 채 한 걸음 더 그에게 다가왔다. 등에 식은땀이 쭉 흘려내렸다. 토니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했다. 오, 젠장. 들켰구나.


 사실은 토니가 지난 2주일 동안 스티브의 뒤를 몰래 따라다니며 그의 행적을 추적한 것으로도 모자라(거의 스토킹 수준으로), 우연을 가장하며 헬리캐리어에 불쑥 나타난다던지 거리에서 토니 스타크를 봤다는 목격담을 만들어 낸다던지 하는 짓을 일삼고 있었다. 이는 그저 순수한 관찰이자 감시라고 토니가 자비스에게 우겨댔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기 감정에 대한 일종의 확인 작업이었다. 스티브 로저스 감시 1주일이 되던 날, 토니는 "내가 저런 꼰대한테 호감이 있을리가 없어! 외모만 취향일 뿐이야! 그래, 외모만!" 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랩실에서 홀로 외쳤었다. 같은 일을 1주일 더 시행한 후 토니는 드디어 반쯤 포기하고 직접 스티브의 뒤를 밟았으나 하필이면 본인과 딱 마주치고 만 것이었다.


 "토니."

 "어, 왜, 무, 뭐.. 왜?"

 "선글라스 좀 벗어 보게."

 "이거? 아니 이건 갑자기 왜? 그보다 잠깐, 우리 지금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토니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슬그머니 발을 뒤로 물렸다. 머리 위로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지척에 스티브가 서 있었다. 스티브는 손을 뻗어 토니의 선글라스를 신속하게,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벗겨버리고는 주머니에 쑥 집어넣었다. 그거 비싼 건데! 안경다리가 휘어지면 어떡해! 그는 속으로 외쳤다. 코 앞에 캡틴 아메리카가 다가와 있는 이 순간 비비안웨스트우드의 선글라스 따위 아무래도 좋았지만 토니는 스티브 외에 신경을 집중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만큼 필사적이었고, 어떠한 예감이 그의 오래된 연애 레이더를 건드리는 것을 무시하고 싶었다.


 "플레이보이라면서, 무드 없기는." 

 "어... 뭐라고?"

 "이럴 땐 눈을 감아야지, 토니."


 놀리는 듯한 저음의 기분좋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는가 싶더니, 도톰하고 약간 거칠한 입술이 와 닿았다. 토니는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굳었지만 말캉하고 축축한 혀가 아랫입술을 두드리는 걸 느끼며 몸에 힘을 풀고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상대의 안쪽 깊숙한 곳까지 얽히고, 마주 안은 손이 뜨겁게 달아오를 정도로 열정적인 키스였다. 토니는 아주 잠깐 스티브의 적극성에 그가 제법 키스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서투른 움직임에 속으로 혀를 차며 능란하게 리드해 주었다. 잠시 후 입술이 떨어지고 발갛게 물든 두 얼굴이 서로를 마주보다가 피식 웃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만남이 두 사람을 여기에 데려다 주었다. 오늘 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by 치우타 2015. 3. 16. 2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