퀼은 원래 이 파티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이름 앞으로 도착한 수많은 초청장(이라고 쓰고 추파라고 읽는다)에는 하나같이 아닌 척 속내를 감추면서도 어떻게든 퀼과 하룻밤을 지새우고자 하는 천박한 욕망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인기가 많은 것도 가끔은 죄라고 생각하는데. 퀼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것들을 쓸어다 쓰레기통에 골인시켰다가, 왠 변덕이 발동했는지 그 중 아무거나 주워들고 눈에 띄지 않게 파티의 구석자리를 차지했다.


 페로몬을 갈무리하고 있어도 준수한 용모때문에 사람들은 언제나 그에게 먼저 접근해왔다. 오늘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애석하게도 파티장의 관심은 다른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퀼은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여러 명의 무리에 둘러싸인 채 눈썹을 찡그리면서도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그보다 체구가 작은 브루넷의 매력적인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퀼은 수많은 시선들 사이에 제 시선도 함께 섞어 주목받고 있는 남자를 관찰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칼에 반짝이는 눈동자, 몸에 딱 맞는 최고급 수제 정장(와우, 저거 진짜 비싼 브랜드인데!). 적당히 사람들을 상대하면서도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치밀한 몸짓. 퀼은 샴페인을 단숨에 비우고 새 잔을 집어들었다. 저거 괜찮네. 말 한번 걸어보고 싶어. 


 하지만 그 남자는 아무래도 파티의 주빈이었던 모양인지 한 시간 반이 지나도록 사람들에게서 좀처럼 놓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남자 쪽에서 자리를 떠나 화장실로 향하는 시점에서야, 팽팽한 그물 같던 인파가 느슨하게 풀렸고 퀼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날랜 몸놀림으로 남자의 뒤를 따라간 그는 슬그머니 여기 저기에 페로몬을 흘려 두었다. 어지간한 애송이는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할 걸. 


 그리고, 마주한 남자는 생각보다.... 귀여웠고, 잘생겼으며, 섹시했다.


 토니 스타크. 그게 남자의 이름이었다. 그는 퀼이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는 반응을 보이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해 보였지만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는데, 그 미소마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내가 미쳤나? 너무 오랜만에 지구에 왔더니 그런가? 퀼은 복잡해지려는 머리를 억누르며 토니의 손을 잡아 품에 가두었다. 


 아까 나던 냄새가 취향이었지... 손에 잡히는 적당히 살집과 근육이 짜여진 몸매도 감촉이 좋았다. 퀼은 속으로 점수를 매겼다. 좋아, 합격. 남자랑은 거의 안 하는데 이건 놀랍군. 토니는 놓으라며 퍼덕거렸지만 퀼에게는 저항은 커녕 귀여운 몸짓으로 보일 정도였다. 토니의 머리카락, 목덜미에서 나는 향은 처음에 퀼을 동하게 하던 것보다 훨씬 더 달콤하고 좋았다. 이게 무슨 향이지. 맡을 수록 알쏭달쏭했지만 그에 비례해서 기분은 점점 좋아졌다. 히트사이클을 맞이한 오메가와는 다르지만 오히려 이쪽이 더 자극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토니가 내내 고소니 뭐니 화를 내며 벗어나기 위해 끙끙거리는 동안, 퀼은 토니의 향기에 한껏 취해있다가 문득 제 신체에 변화가 왔음을 알아차렸다.


 아. 예상밖의 전개잖아. 


 "저리 좀, 가... 네가 러트거나.. 말거나.. 힉!"

 "당신도 반응하는 것 같은데.. 토니. 나 잘해요. 응?"

 "이런, 미친.. 아...."


 토니는 남아있는 힘을 최대한 쥐어짜서 퀼에게 주먹을 휘두르려고 시도했지만, 다리가 풀려 있는 상태에서는 그저 허공에 헛손질만 할 뿐이었다. 기가 센 것도 귀여워. 퀼은 낮게 웃으며 토니를 번쩍 안아들었다. 이거 안 놔? 숨을 반쯤 헐떡이면서도 토니는 죽일 듯이 퀼을 노려보았다. 아, 안 되는데. 그는 지금 알파의 가장 민감한 본능을 건드리고 있었다. 지배욕. 정복욕. 역시 오메가도 알파도 아니로군. 둘 중 하나라면 절대로 이렇게 할 수가 없지.


 "쉿.. 토니. 여기서 뒷문이 가까운데, 당신 차는 어디에 있어요?"

 "....빌어먹을. 정원 근처에, 붉은 색.. 제일 비싸보이는 거."

 "아, 저기 보이는 차에요? 끝내주네. 조금만 참아요."


 사실 내가 죽을 것 같지만, 러트를 차 안에서 보내는 건 당신한테 못할 짓이라서. 퀼은 이제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의 품 안에 늘어져 있는 토니를 보며 장난꾸처기처럼 씩 웃어보였다.



by 치우타 2015. 7. 1. 02:19

 "토니. 오늘은 아침에 일정 없나? 일어나야지."

 

 스티브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불을 살짝 들어올리며 곤히 잠든 토니의 둥그런 이마에 입술을 부볐다. 으응, 오늘 나 쉴 거야.. 잔뜩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토니가 몸을 뒤척거렸다. 그런 움직임조차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스티브는 못 견디겠다는 듯 토니를 팔 안에 가둔 채 콧잔등을 부비고, 온 얼굴에 키스를 쪽쪽 해댔다.

 

 "아, 진짜... 어제 그렇게 괴롭혀 놓고.."

 

 결국 토니는 불만을 터트리며 팔을 버둥거렸다. 스티브의 단단한 근육은 꼼짝도 하지 않아서 해 봤자 무의미한 저항이었지만 몸에 걸쳐져 있던 이불이 벗겨지고 나신이 드러나자 이번엔 맑은 푸른 눈에 작은 불꽃이 튀었다. 나 저거 알아. 하지 말라고 해도 정줄 놓고 달려들 때 몇 번 봤었어. 토니는 애써 웃으며 스티브의 팔을 어깨로부터 치웠다.

 

"허니, 달링, 스티비. 우리 정말 늦게까지 했던 거 알지? 더는 안 돼. 나 죽어. 그러니까.. 으악!"

"당신은 메카닉이잖아. 뭐든 고칠 수 있는. 그러니까 날 좀 고쳐 줘, 토니."

"아니, 아니 이거 안 고쳐지던데...."

"그럼 이대로 사랑해 줄래?"

 

 이젠 거의 능글맞아보이는 웃음을 입가에 띄우며 스티브는 토니의 얼굴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고, 숨결이 섞이고, 방 안의 온도가 조금씩 올라가는 게 느껴진다. 누가 젊은 애인이 좋댔어? 토니는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아침의 키스와 포옹 그리고 더 뜨거운 섹스는 최근의 토니를 달콤한 꿀단지에 퐁당 빠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스티브 또한 기꺼이 꿀단지 속으로 뛰어들어 토니를 안고 깊게 잠수했다. 내 사랑. 내 귀염둥이. 눈부신 햇살만이 어쩔 줄 모르며 창가를 배회했다.

 

by 치우타 2015. 6. 27. 22:30

 토니는 소코비아 사태 이후 조금 쉬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꽤나 자주- 1주일에 한 번은 꼭 어벤져스의 새로운 뉴욕 지부에 들렀다. 그렇다고 해서 닉 퓨리나 스티브를 만났다는 건 아니었다. 그의 친우인 제임스 로드 중령을 만난 것도 아니고, 토니가 만나러 온 상대는 바로 비전이었다. 이 사실을 아는 건 비전과 토니를 포함한 아주 소수의 인원들 뿐이었다. 방문 이유도 목적도 밝히지 않은 채 토니는 불규칙적인 일정으로 비전을 찾아와 잠시 머물다 가곤 했다.


 비전은 스티브가 훈련시키고 있는 어벤져스의 새로운 멤버 중 한 명이었으므로, 토니는 늘 훈련 스케줄을 어떻게든 알아내서 비전이 혼자 있을 때를 노려 찾아왔다. 토니는 처음엔 비전에게 겉치레뿐인 인사나 그 특유의 호기심 넘치는 화법을 사용했지만 당사자인 비전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반응 자체가 무척 재미없다는) 걸 알아챈 다음부터는 그냥 혼자서 뭐라고 떠들다가 가곤 했다. 돌아가기 전에, 토니는 꼭 비전의 눈을 한참동안 들여다보고 갔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약간은 절박한 얼굴로. 때로는 서글픈 얼굴로. 또 언젠가는 체념한 얼굴로.


 비전은 토니의 방문에 익숙해지면서 그가 짓는 표정들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토니 스타크,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만든 사람. 과연 그는 비전에게서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인피니티 젬에 관심이 있을 거라는 게 가장 현실적이고 가까운 이론이었지만 정작 토니는 비전의 이마 정중앙에 박혀 있는 보석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망토를 만지작대거나, 조잘거리거나, 말 없이 비전의 눈을 바라보는 것 외엔 특별한 게 없었다. 언젠가 한 번은 토니가 예의 그 아이 컨택 타임을 가졌을 때 그의 눈은 갑작스러운 슬픔으로 크게 흔들렸다. 비전이 거기에 의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짙은 선글라스가 그린 헤이즐넛의 눈동자를 가린 탓에 그는 한동안 토니의 표정에 대해 생각했다.



 "제게서, 무얼 찾고 있는 겁니까?"


 하루는 비전이 드디어 질문을 던졌다. 토니는 허를 찔린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이더니, 이내 씩 웃었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


 나 갈게. 나오지 마. 토니는 선글라스를 빙글빙글 돌리며 빠르게 등을 보이고 걸어가 버렸다. 차가 출발하는 소리에 비전은 문 앞으로 날아가 보았지만 이미 그 자리엔 흙먼지가 일렁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후 토니의 방문은 거짓말처럼 끊어졌다. 비전은 일주일을 변함없이 보내면서 규칙적인 일과 하나가 빠졌다고 생각했고 그게 바로 토니의 장난스러운 얼굴과 매력적인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왜 오지 않는 것일까. 그렇게 1주일, 2주일이 흘러갔다. 비전은 토니가 여전히 타워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스티브에게 간략히 외출을 보고하고 (장소가 어벤져스 타워라는 것에 스티브는 눈썹을 찡그리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직접 토니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토니는 글래스를 들고 미니바에 기대서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대뜸 정면에서 날아들어온 비전을 보고 깜짝 놀란 나머지 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맙소사,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여긴 어떻게 왔어? 왜 왔어?"

 "무언가를 찾으러 왔습니다."

 "......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뭐야, 토니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2주만에 보는 미소였다. 비전은 이제야 제 일상이 제대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말 없이 토니의 반짝이는 그린 헤이즐넛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가 그랬듯이,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by 치우타 2015. 6. 25. 0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