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언제 어떤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다고 스티브는 늘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수퍼솔져 혈청의 수혜자가 되기 전까지는 몇 번이나 군 입대에 실패했으며, 제 의지를 따라주지 않는 병약한 몸에 슬퍼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다 하이드라의 무기를 처리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바다에 돌진한 다음에도 살아남아서 70년의 세월을 뛰어넘고 보면, 반 강제적으로 세상만사에 어느 정도는 해탈하기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스티브는 가지런히 모아져 있는 제 앞발을 바라보았다. 손이 아니라 '발' 이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센트럴 파크의 한적한 곳에서 산책하던 그는 갑작스레 덮쳐오는 고통을 느꼈고, 구조 요청을 할 새도 없이 그대로 정신을 잃었더랬다. 잠시 후 눈을 떠 보니 널브러진 옷가지들 위에 모로 누워있었다. 왠 옷이지? 하고 의문을 가진 것도 잠시, 그게 자신의 것임을 알아본 스티브는 황급히 손을 움직였지만 시선에 들어온 것은 개의 앞발이었다. 깽! 심지어 입에서 나온 비명소리조차 개의 울음소리였다! 근처에 있던 호숫가에 달려가 얼굴을 비춰 보니- 거기엔 두려움에 사로잡힌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스티브는 한동안 충격으로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우선 옷가지를 보이지 않는 덤불에 숨겼다. 그는 산책하러나오면서 겨우 작은 수첩과 연필, 낡은 시계를 챙겼을 뿐이었지만 이런곳에서 엉뚱하게 옷이 발견될 경우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일이 커질 수도 있었다(경찰이라거나). 그 다음엔 이렇게 된 원인과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명 무언가 계기라던지 배경이 있었을 터,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갑작스럽게 개로 변하는 일이 일어날 리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자면 도움이 필요한데. 스티브는 몇몇 동료들을 떠올렸다.

 

 처음 그는 샘을 생각했다. 버키 일로 가까워진 그는 믿을 만한 친구였고, 물심양면으로 스티브를 도와주려고 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 내가 스티브 로저스임을 알리는가' 였다. 지금 그는 개였다. 아무리 말을 하려고 노력해 봐도 그저 왕, 멍, 하는 개의 짖는 소리만 입 밖으로 튀어나올 뿐 소용이 없었다. 이어 떠오른 로마노프나 바튼(그는 농장에 가서 가족들과 지내는 중이다)도 논외였다. 배너 박사는 피지 섬에 있다고 했던가. 신 뉴욕지부는 여기에서 거리가 너무 멀어서 개의 몸으로 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게다가 그 많은 인원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게 비효율적인 거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스티브는 문득 고개를 돌려 도심 쪽을 바라보았다. 크고 늠름한 어벤져스 타워가 마치 그가 봐주기를 기다렸다는 양 거기 서 있었다. 그는 거기에 상주하는 집주인을 떠올렸다. 토니 스타크. 미래 속에 사는 남자. 어쩌면 그가 스티브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설령 아니라고 해도, 지금 스티브에게는 선택권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마음을 정한 스티브는 다시 한 번 옷을 감춘 덤불을 흘낏 바라보고는 타워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센트럴 파크에서 어벤져스 타워에 가는 길은 보기보다 거리가 꽤 되었다. 개가 되어버린 바람에 더 그렇게 느껴졌겠지만, 가는 도중 엎친데 덮친 격으로 거센 소나기마저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멋지군. 비로 인해 체온이 떨어지자 처음만큼 속도가 나질 않았다. 그리고 아침에 산책 나온 후 아무것도 먹질 못해서인지 점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수퍼 솔져는 개가 되면 수퍼 개는 아니라는 건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스티브는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었다. 조금만 더 가면 멤버들이 이용하는 전용 입구가 보일 터였다. 젖은 털이 물 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졌다.

 

 "어라? 왠 개지?"

 

 거의 흐느적거리면서 입구에 다다랐을 때, 특유의 울림이 있는 장난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스티브는 지옥에서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반색하며 뒤를 돌아보았고 거기엔 역시나 토니가 서 있었다. '스타크!' 그는 토니를 외쳐 불렀지만 멍! 하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안녕.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아무나 들어오는 데가 아닌데. 응? 멍멍아."

 "멍, 멍멍!"

 "그리고 너 완전 쫄딱 젖었는데.. 우왓, 잠깐!"

 

 스티브는 무작정 토니에게 달려들었다. '스타크, 나 스티브 로저스야. 나 좀 도와줘. 그냥 산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변해버렸어.' 폭포수처럼 쏟아낸 말은 지치고 서러운 마음이 듬뿍 담긴 낑낑거림으로 흘러나왔다. 토니는 왠 개가 비에 젖은 채로 타워 전용 출입구를 서성거리던 것도 모자라 그에게 달려들어 애처롭게 끙끙거리고 있는 걸 보고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주인을 찾거나 내보내야 하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금빛 털을 가진 개는 토니의 옷이 온통 젖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부벼왔다. 버려진 개인가. 토니는 씁쓸한 얼굴로 개를 바라보다가 이내 품에 안아들었다(뭐가 이렇게 무거워? 깜짝 놀란 그는 허리에 힘을 줘야만 했다).

 

"일단 나랑 같이 올라가자. 너 목욕도 좀 하고.. 밥도 먹고. 나머진 다음에 생각하지 뭐."

"멍!"

"좋다고? 잘 됐네. 자비스, 최상층."

 

 토니는 개를 안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개(스티브)는 얌전히 토니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자신의 존재를 토니에게 증명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지금은 두근거리는 토니의 심장 소리가 듣기 좋아 스티브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by 치우타 2015. 7. 28. 15:06

안녕하세요!!!

펑크라고 쓴 지 일주일 만에... 얇은 카피본 신간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ㅠㅠ

처음 구상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단편입니다만 괜찮으신 분들은 들러 주세요!

 

<Hooked on a Feeling>

부스위치 : 우4-b

A5, 16p, 중철본, 가격 2000원 예정 / 50부 출력

MCU 퀼x토니

어느날 갑자기 타워에 뚝 떨어진 퀼과 토니의 이야기. 해피엔딩.

 

*샘플 - 바로 이어지는 내용은 아닙니다.

 

 

 

부스 위치는 이쪽입니다 :) 내일 행사장에서 뵈어요!!!!

 

 

by 치우타 2015. 7. 24. 09:25

 우주를 구한 영웅에게도 휴식은 필요하지. 셰퍼드는 부상에서 회복되자마자 약간의 휴가를 얻었다. 하루 내내 병상을 지키던 케이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해켓 제독이 직접 방문해서 그의 상태를 체크하더니, 2주 정도 마음대로 쉬고 와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 너무 늦진 말라는 당부도 짧게 붙인 제독은 무심한 걸음으로 금방 사라져 버렸다. 케이든이 마실 걸 사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셰퍼드는 멍한 얼굴로 병실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셰퍼드? 왜 그래요?"

 "아, 어... 해켓 제독이 왔다 갔어."

 "제독님께서..? 무슨 일로요."


 조건반사적으로 얼굴을 굳히며 자세까지 바로 하는 케이든의 모습에 그제야 셰퍼드는 피식 웃었다. 


 "별 거 아냐. 곧 퇴원이라고 했더니 2주 정도 마음대로 쉬고 오라더군."

 "....음, 그거 휴가라는 뜻이죠?"

 "그렇지. 포상 휴가치고는 너무 짧지만."

 "이거 시타델 카운슬에도 알려야 되는 걸까요?"

 "그건 걱정 말라던데."


 셰퍼드는 팔을 위로 쭉 뻗으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해켓 제독에게는 곧 퇴원이라는 말만 했지만 사실 내일 오전이면 여기를 나갈 계획이었다. 병상에 누워 있는게 체질에 안 맞기도 했지만 워낙 케이든이 엄격하게 그의 상태를 관리한 덕분에 평소보다 더 빨리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셰퍼드는 몇 번 투덜거렸지만 그럴 때마다 케이든의 '커맨더' 라는 부름에 두 손을 들며 항복을 표시했다. 


 "여기도 오늘이 마지막이군. 왠지-"

 "섭섭하다고 하시면 화낼 겁니다."

 "....나 모르는 새에 독심술이라도 익혔나? 요즘 좀 무서운데."


 아니면 당신이 알기 쉬운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죠. 케이든이 부러 침대 시트를 팡팡 털었고 셰퍼드는 재채기를 하지 않기 위해 잽싸게 손으로 코를 쥐었다. 우주와는 달리 지구의 군 병원은, 그것도 셰퍼드가 묵고 있는 병실은 특 VIP급 같은 것으로 상당히 넓고 조용했으며 조금 쓸데없이 호화로웠다. 그래서 침대 또한 우주의 시설들처럼 딱딱한 철제가 아니라 최고급 매트리스에 시트, 푹신한 베개 등을 갖추고 있었다. 케이든이 잠을 청한 간병인용 (방문자용) 침대도 싱글베드 급이라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으리라. 


 슬슬 잘 시간이 다가오자(병원에 있는 동안에는 환자니까 빨리 자요, 라고 케이든이 엄하게 말했다) 셰퍼드는 갑자기 안절부절한 모습을 보였다. 케이든에게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이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는 것 같았다. 답지 않게 왜 저러시지. 케이든은 모르는 척 정리된 침대쪽으로 걸어갔다. 아니, 걸어가려고 했다. 셰퍼드가 그의 팔목을 낚아채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왜 그래요?"

 "오늘은 여기서 같이 자자."

 "여기?"

 "내 침대."


 셰퍼드가 다른 손으로 옆자리를 토닥였다. 아까도 말했듯이 침대는 쓸데없이 고급이었기 때문에 성인 남자 두명이 누워도 충분히 공간이 남을 정도로 컸다. 그것과 별개로 케이든은 입을 벌리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왜 그래? 뭐가 문제야? 셰퍼드는 아주 태연한 얼굴이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아시죠?"

 "병원이지."

 "군 병원입니다."

 "뭐.. 그렇지. 그래서?"

 "그래서, 라뇨! 군 병원에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케이든은 얼굴을 붉히며 뒷말을 얼버무렸다. 젠장. 말을 꺼낸건 저 사람인데 왜 내가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지? 정작 셰퍼드는 도대체 그게 왜 문제냐는 식으로 말을 던져왔다.


 "별로 다른 생각 한 거 없어. 그냥 같이... 잠깐, 설마. 오, 알렌코."

 "좋은 말 할때 거기서 멈추시죠."

 "내가 물론 종종 생각없이 키스하거나 포옹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병원 침대에서 섹스하자고 달려들진 않아."

 "그런 생각 한 거 아닙니다."


 귀까지 빨개졌으면서. 셰퍼드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고 대신 케이든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인데 하루 쯤 같이 자도 되잖아. 간호사들이 들릴 일도 없을 거야. 셰퍼드는 조근조근 논리적으로 그를 설득했고 케이든은 그게 어디까지나 들키지 않았을 경우에나 해당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그 말에 넘어갈 것을 알았다. 알았으니까 옆으로 좀 가요. 케이든은 괜히 셰퍼드를 밀면서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셰퍼드는 뭐가 그리 좋은지 소리 죽여 웃으며 시트를 높게 들어주었다. 이윽고, 병실의 불이 꺼졌다.


 잘 자. 잘 자요, 셰퍼드.


 마주 안은 체온이 따스했다.

by 치우타 2015. 7. 20. 2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