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퍼와의 기나긴 싸움이 끝난 후, 셰퍼드는 시타델 카운슬에 휴가계(라고는 해도 거의 통보였지만)를 내고 케이든과 함께 지구로 돌아왔다. 얼라이언스에서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고 셰퍼드가 그걸 해결한 과정이라던가 향후 어떻게 될지에 대해 알고 싶어했지만, 그는 과감하게 노르망디의 비상 라인을 제외한 모든 통신을 끊어버렸고 이번엔 케이든도 말리지 않았다. 이 휴가를 떠나기 전에 셰퍼드가 했던 한 마디의 말 때문이었다.


 "이번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줘."

 "갑자기 듣기도 전에 불안해지는데요."

 "이런. 그렇게 신뢰가 없나?"


 셰퍼드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케이든은 아직 붕대를 온 몸에 칭칭 감고 있는 그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벌써 두 번이나 죽을 뻔 했잖아요. 그 중에 한 번은 진짜 죽었었고. 셰퍼드는 끄응, 하는 침음성을 낼 뿐 거기에 별다른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겠는가. 처음부터 죽자고 마음먹었던 적은 없었지만 지난 임무들은 하나같이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임하지 않으면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겁고 깊은 무엇이었다. 케이든 또한 그걸 알고 있기에 셰퍼드에게 그 이상의 타박이나 원망을 던지지 않았다. 병원에서의 일주일은 그렇게 흘러갔고 퇴원하는 날 셰퍼드는 휴가계를 던지고 바로 이렇게 잠적해 버렸다.



 "와, 경치 끝내주네."

 "탁 트여서 좋기는 하군요."


 제법 감격한 얼굴로 호텔 방에서 바닷가를 내려다보는 셰퍼드와 달리, 케이든은 별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여기 와본 적 있어? 셰퍼드는 괜히 심술이 나서 케이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안 어울리게 간지러움을 타는(특히 허리는 쥐약이었다) 그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몸을 꺾었다.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이랑 와봤던 것 같아요. 희미해서 잘 기억나진 않지만.."

 "하와이에 왔단 말이야? 집이 바닷가에 있었다면서."

 "일단 그래도 유명하잖아요."

 "관광지 느낌으로 왔었다는 소리로 들리는걸."


 셰퍼드는 이제 반쯤은 대놓고 심술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래요? 케이든이 난처하게 웃었다. 셰퍼드는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할 때엔 늘 침착하고 냉정을 유지하는 편이지만 자신과 둘이 있을 때면 어린애처럼 굴곤 했다. 처음엔 그게 적응이 안 되서 무척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으나 이젠 어떤 타이밍에 달래고 어떤 타이밍에 받아쳐줘야 하는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셰퍼드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난간에 등을 기대어 섰다.


 "내가 여기 오자고 한 이유가 뭔지 아나? 알렌코."

 "갑자기 또 그렇게... 모르겠는데요. 여행? 휴양?"

 "아. 역시 전혀 눈치채지 못했군. 실망이야.. 상처받았어."


 그는 어울리지 않게도 시무룩한 팔자 눈썹을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케이든은 이번에야말로 당황해서 셰퍼드에게 다가갔다. 왜요? 대체 뭡니까? 셰퍼드는 케이든이 완전히 방심하기를 기다렸다가, 두 팔을 뻗어 그를 품 안에 가두어 버렸다. 존! 이번엔 케이든 쪽이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탄탄하게 감겨드는 몸이 기분 좋았다.


 "우린 말이야. 허니문을 온 거라고."

 "......에?"

 "Honeymoon.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아니, 그야 당연히, 그렇지만 아직..."


 반지는 끼고 있으니 식은 나중에 올리는 걸로 하자고. 셰퍼드가 개구쟁이처럼 씩 미소를 짓자, 불편한 듯 몸을 꿈지럭거리던 케이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어버렸다. 당신은 이럴 때 보면 정말 제멋대로야. 투덜거리는 말 속엔 불만보다는 애정이 녹아 있었다. 그럼 이제 바닷가 구경 갈까? 여기 오면 해보고 싶었던 것도 있어. 



 "그래서 해보고 싶었다는 게...."


 겨우 이런 촌스러운 하와이안 티셔츠를 입고 해변을 산책하는 거였어요? 케이든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텐션이 올라간 셰퍼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바야흐로 여기가 하와이다! 난 관광객이다! 하고 외치는 것 같은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에 약간 무릎 위로 올라오는 반바지를 입고 모래사장을 거닐고 있었다. 


 "뭐 어때. 커플 티잖아. 이래야 오히려 사람들이 신경을 안 써."

 "근데, 셰퍼드.. 그 머리에 그 옷, 엄청 수상해 보여요."

 "나같이 순박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셰퍼드는 일부러 양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최대한 어색하게 웃어 보였고, 케이든은 그 얼굴에 그만 폭소를 터트렸다. 당신 그건 임무할 때 겁주는 용으로만 써요. 무서우니까. 웃음기 어린 케이든의 말에 셰퍼드는 짐짓 기분이 상한 것처럼 이마를 찌푸렸지만 뭐라고 말하는 대신 부드러운 동작으로 케이든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금방 거리가 좁혀지며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고,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를 천천히 포옹했다. 


그리고- 마침내 입술이 맞닿았다. 


by 치우타 2015. 8. 3. 23:16

 "꼭 어미새와 새끼새 같네요."

 

 타워 내에 어디를 가던지 꼭 같이 붙어다니는 토니와 캡틴을 보고 페퍼가 한 마디로 평했다. 그렇게 보여? 토니는 씩 웃으며 캡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캡틴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얌전히 토니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

 

 "당신이 새끼새 쪽이에요, 토니."

 "뭐? 내가 왜??"

 "멍!"

 

 그제서야 캡틴이 한결 밝아진 얼굴로 기쁘게 짖었다. 동물에게도 표정이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던 페퍼도 생긋 미소지었다. 부루퉁해진 토니에게서 빠져나온 캡틴이 페퍼를 올려다보며 꼬리를 살랑대었고, 그녀는 기꺼이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었다. 애 같은 사람이지만 토니를 잘 부탁해. 캡틴. 그녀의 속삭임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캡틴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멍, 하고 대답했다.

 

 확실히 캡틴은 토니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늘 몇시간이고 랩실에 처박혀서(그나마 배너가 있을때는 나았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올 생각을 않더니만, 어느 날 갑자기 개를 주워왔다며 기르기 시작했다. 토니의 일상은 캡틴에게 맞춰져서 점점 괜찮아지고 있었고 얼굴 표정도 어둡지 않았다. 어딜 가든 토니 옆엔 캡틴이 있었고 즐거움이 있었다. 정말 평온한 일상이었다.

 

 

 오랜만에 스티브는 악몽을 꾸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돌아갈 곳이 없는 자신, 잃어버린 친구, 놓쳐버린 시간들. 젊은 페기의 얼굴, 나이든 페기의 약해진 모습과 모자를 쓰고 웃는 버키, 강철 팔을 장착한 채 스티브를 노려보는 버키가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버키, 내 친구. 너를 구하지 못해서 미안해. 포기해서 미안해. 주위가 시꺼멓게 물들었다.

 

{데이트가 있었어요.}
이번엔 라디오처럼 지직거리는 노이즈 사이로, 그의 허탈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스티브, 우린 집에 갈 수 있어요.}

다시 노이즈가 섞이더니 이번엔 희망과 기쁨에 찬 페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뒤를 돌아보자, 스티브 외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때 보았던 환상과 거의 완전히 똑같았다. 이건 꿈이야. 깨어날 수 있어. 깨어나야 해. 점점 어두워지는 공간 속에서 스티브는 고개를 저었다. 몸이 무거웠다. 점점 늪에라도 빠져드는 것 같았다.

 

 "끄으응..."

 

 어디선가 미약한 신음 소리 같은것이 들려와서 토니는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완전히 각성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워낙 늘 예민하게 곤두서 있는 탓에 그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끙, 끄응.. 끼잉. 다시 한 번 들어보니 사람이 아니라 개가 끼잉거리는 소리였다. 이 방에는 딱 둘 뿐이다. 토니와, 캡틴. 그는 상체를 일으켜 살금살금 침대가로 다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언제나처럼 앞발에 고개를 얹고 잠든 캡틴이 무척 괴로운 듯이 신음하고 있었다. 개도 꿈 같은걸 꾸나? 토니는 작은 목소리로 그의 충실한 조수를 불러냈다.

 

 "자비스. 개도 꿈을 꿀 수 있어?"

 [연구 결과, 동물들에게서도 REM수면 상태가 나타났고 말을 배운 고릴라가 꿈과 현실을 혼동하여 말한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죠.]

 "음.. 그렇군."

 

 소리나 표정, 몸짓으로 미루어 보아 캡틴은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자는 중에 깨워서 미안하지만 악몽은 길어질수록 더 오래 상처가 남게 된다는 걸 토니는 알고 있었기에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가서 캡틴의 몸을 흔들었다. Hey, buddy. 일어나 봐. 응? 캡틴. 이윽고 잠에서 깼는지 캡틴의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드러났다.

 

 "악몽이라도 꿨어? 응?"

 "...끄응.. 낑, 끄응."

 "그래그래. 이리 와. 나랑 같이 자자."

 

 토니는 팔을 벌렸다. 캡틴은 망설임 없이 그의 품으로 뛰어들더니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서럽게 낑낑거리며 고개를 부볐다. 그래, 무서웠어? 착하지. 이제 괜찮아. 나 여기 있어. 토니는 캡틴을 안고 달래며 침대 위에 올라가 그의 바로 옆에 뉘였다. 떨리던 푸른 눈동자가 다시 감기고, 고른 숨소리를 색색 낼 때까지 토니는 캡틴을 쓰다듬어 주었다.

 

 

 다음 날 아침, 캡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부산을 떨어 토니를 깨우고 하루를 시작했다. 너 어제 내가 재워줬는데.. 라며 토니가 반쯤 감긴 눈으로 항의했지만 자비스의 스케줄러 낭독을 듣고 축 처진 어깨로 욕실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캡틴, 스티브는 뿌듯한 얼굴을 한 채 욕실 앞에 앉았다. 스티브는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흔들어 깨우던 토니의 걱정스러운 표정, 다정한 목소리, 따뜻한 손. 무언가가 울컥 솟아오르는 느낌에 스티브는 그대로 토니에게 괴로움을 토로했다. '스타크. 토니. 토니. 악몽을 꿨어. 내가 있을 곳이 없었어.' 그 내용들을 알아듣지는 못했겠지만 토니는 그저 가만히 그를 안고 달래주었다. 괜찮다고, 옆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무척 단순한 위로였지만 어쩐지 안심이 되어 스티브는 토니의 옆에서 푹 잠들 수 있었다. 스티브는 아주 조금이지만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할 일이 많아서 그럴 수는 없을 터였다. 곧 자신에 대한 연락도 토니에게 닿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이대로 느긋하게 지내도 되겠지. 가운을 두르고 나오며 씩 웃는 토니에게 스티브는 꼬리를 흔들어 주었다.

 

by 치우타 2015. 8. 3. 14:02

 캡틴의 애완용품이 도착한 뒤 토니는 우선 반짝반짝 빛나는 밥그릇에(아주 비싼 브랜드품이었다) 사료를 부어 주었다. 하루에 2-3회 정도라고 했지. 왠일로 세세한 정보까지 기억해 가며 챙기려던 토니였으나, 정작 캡틴은 하루 내내 사료의 냄새만 몇 번 맡을 뿐 입도 대지 않았다. 왜 그래? 사료가 별로야? 잘 시간이 되어 방으로 돌아와 러그 위에 엎드린 캡틴에게 물어보아도 눈을 깜박이며 올려다볼 뿐 짖거나 끙끙거리지도 않았다. 며칠 간 사료의 종류를 바꿔서 주기도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고 결국 토니는 처음처럼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식사를 주었다. 캡틴은 꼬리를 살랑이며 맛있게 먹어치웠다.

 

 "너 입맛 까다롭구나."

 "멍!"

 "그러다 이빨 약해져. 뭐 이것저것 생식으로도 관리 가능하다고는 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이랑은 관계가 없나보다. 토니는 캡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캡틴은 고개를 위로 들어 젖히며 토니의 손을 넘기고는 무릎께에 머리를 비볐다. 제법 친근하게 굴 줄도 알고. 역시 주인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먹이도 맛있는 것만 먹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가... 거기까지 생각하던 토니는 급작 마음이 짠해지는 걸 느꼈다.

 

 "캡틴, 우리 놀까? 여긴 넓어서 프리스비 던지기도 할 수 있어."

 "멍! 멍!"

 "좋아. 그럼 이걸로 하자."

 

 토니가 방패 모양 프리스비를 들고 흔들었다. 구입한 장난감들이 영 시원찮아서 그가 직접 만든 작품이었다. 캡틴이 다시 멍, 하고 짖었다.

 

 

 한편 스티브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든 사료를 먹지 않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제법 맛있는 냄새가 나서 하마터면 그대로 고개를 그릇에 처박을 뻔 했다), 토니가 환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거나 목을 끌어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꼬리를 살랑거리는 건 기본이었다! 아니, 애초에 의견이 맞지 않을때를 제외하면 그렇게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반가운 느낌은 아니었는데. 게다가 그는 지금 무려 토니와 프리스비 던지고 받기(물어오기)를 하고 있었다. 토니가 랩실에서 직접 만든 방패 모양 프리스비는 쓸데없이 실제 방패와 매우 비슷해서, 날아가는 방향을 예측하기가 쉬웠고 스티브는 백발백중으로 잡아냈다.

 

 "캡틴! 굉장해! 역시 넌 보통 개들이랑은 다른 것 같아."

 "멍! 멍멍!"

 "아주 잘 했어. 착하다."

 

 스티브는 입에 물고 온 방패를 토니에게 순순히 건네주었다. 방패를 바닥에 내려놓은 토니가 뿌듯하고 행복한 얼굴로 스티브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더니 아예 와락 끌어안고 뽀뽀를 퍼부었다. '세상에, 스타크!' 스티브는 깜짝 놀라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실제로 취한 행동은 반대였다. 토니의 품에 얌전히 고개를 부비적거리며 신나게 꼬리를 흔들었다. 그야말로 주인에게 사랑받아서 한껏 기분이 고양된 개의 모습이었다. 그가 정말 캡틴이라는 걸 알리고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을 찾는게 급선무였으나,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그는 지금 얼음 속에서 깨어난 후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인정하기 싫었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스티브는 평소의 그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토니의 웃는 얼굴을 힐끔 올려다 보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밝은 모습이었다. 요 근래에 발견한 '새로운 스타크'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군. 스티브는 좀 더 느긋하게 토니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토닥이며 만져오는 손길이 무척 기분 좋았다. 

 

by 치우타 2015. 8. 3. 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