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아침에 일어나 할 일을 확인하고, 정해진 시간에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것.
캡틴 아메리카-스티브 로저스의 하루는 그렇게 단조로운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주변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로, 가끔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고 몇몇 아가씨들이 대화를 걸어오곤 했으나 그리 길게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본인에게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 우선 첫번째 이유이고, 다음으로는 정중하면서도 완곡한 거절과 이미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은근한 뉘앙스가 섞인 말을 듣고 나면 아무리 그가 잘 생기고 몸매까지 근사한 남자여도 대부분의 여자가 포기하며 떨어져 나간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스티브에게 연인이 있다는 사실과 그 상대가 무려 토니 스타크라는 점일지도 모르지만.
[어, 지금 가는중이야. 내 차들 있는 주차장에서 기다려.]
"알았네, 거기서 보지."
여상스레 걸려온 전화를 받고 걸음을 옮기면서 문득 생각해본다. 스티브가 토니와 사귀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 주위 사람들(이라고는 해도 토니의 가까운 친구들과 쉴드 관계자들 뿐이지만)은 하나같이 걱정과 염려, 만류의 말을 입에 담았다. 더욱 놀라운 건 그것들 중 8할이 '캡틴이 아깝잖아요' 라는 표현이었다. 여러 고민과 생각 끝에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의외로 토니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관계였기에 두 사람의 교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는 건 결국 스티브였다. 어쩌면 토니도 그렇겠지만 현재로서는 그랬다. 상대가 남자고, 아이언맨-토니 스타크라는 점에 대해 모두들 입을 모아 우려했지만 정작 스티브는 자신이 과연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에 대해 더 오랫동안 고뇌했다. 70년간 얼음에 갇힌 남자. 전쟁이 끝난 후 덩그러니 남은 오래된 군인. 달라진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유하며 방황하는 젊은 청년. 가진것도, 하고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제대로 정하지 못하는 초라한 사람. 아무리 냉정하게 재 보아도 아까운 것은 자신이 아니라 토니 쪽이었다. 모든것을 가졌고, 혼자서 22세기를 살고 있으며, 화려하고, 멋지고, 조금 가벼워 보이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누구보다도 성실해지는 남자. 천재, 조만장자, 플레이보이, 자선사업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려 스티브는 몇날며칠을 한숨과 괴로움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백했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건만 진지한 관계로 발전한 지금에도 그 의문은 형태를 달리했을 뿐 아직도 남아 있었다.
나는 토니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충만하고 안정적인 기분을 느끼는데, 정작 토니는 어떨까.
한 달이나 만나지 못한 채로 간간이 연락만을 주고받으며 지낸 후여서인지 그런 생각이 불쑥 불쑥 머릿속을, 가슴 깊은 곳을 휘저으며 돌아다녔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완벽하게 개인적인 공간에 발을 들이고 나서야 호흡이 제대로 돌아오는 것을 느낀다. 스티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멀리서 까딱이는 손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일단 저쪽 가서 타. 어디 갈지는 앉아서 정하고."
"그러지."
없는 시간을 짜내어 왔을 거라는 추측은 이미 하고도 남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달은 너무 심한 처사였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와서였는지 입술이 멋대로 열렸다. 솔직히 그 동안 참은 나날들이 많기도 했으니, 한 번쯤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토니, 솔직하게 말 좀 해봐도 괜찮겠나?"
"......."
"...내가 자네의 사회적 입지를 모르는거야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씩 이건 너무하다고-"
"스티브, 우리 여기서 할래?"
토니의 말이 도화선이 되어 우리는 금방 꼬리에 불 붙은 짐승마냥 급하게 달라붙었고, 서로를 벗기고, 도발하고, 키스하면서 그대로 섹스했다. 한 달이나 못 봤지만 여전히 토니는 사람 속을 살살 긁으면서 원하는 걸 얻어낼 줄 알았고 나는 그 말에 흥분하여 몇 번 맞불을 놓다가 결국엔 그에게 키스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외엔 도리가 없었다. 눈 앞의 남자를 당장이라도 씹어삼키고 싶다는 난폭한 소유욕과 애정, 욕정에 시달리면서 토니가 원하는 대로 온통 휘저어놓았다. 그러다 자기가 죽겠다고 말하면서도 끌어안은 팔을 놓지 않는 토니가,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 없었다.
눈을 떠 보니 이마엔 'Busy' 라고 쓰여진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었고, 토니가 있던 흔적만 남아 있었다. 조금 미지근한 것으로 보아 허겁지겁 뛰쳐나간 모양이었다. 주인을 잃은 침대에서 혼자 늘어져 있어도 별 수 없는데다가, 오늘은 갑자기 토니를 만날 수 있게 된 바람에 기존의 스케줄은 몽땅 연기한 상태라 남은 오후시간 동안 다 소화해내야 할 판이었다. 물론 언제나 넉넉한 스티브 로저스의 일정이다보니 큰 문제는 없었다. 씻기 전에 물이라도 마실까 싶어 들어간 키친의 냉장고에 작은 쪽지가 붙어 있는걸 발견하곤 떼어내 읽었다. 시비를 거는 건지 쪽지를 남기겠다는 건지 알기 어려운 글을 읽어내려가다가 문득 마지막 문장에 눈이 멈추었다.
[....옆에 누워있다가 일어서서 나가려니 마음이 아쉽네. 시간나는 대로 연락할게...]
망설이는 듯 삐뚜름한 글씨로 적어둔 문구. 관록있는 플레이보이가 쓰기에는 조금 부족하고 완곡한 표현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스티브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솔직하고 마음에 와 닿는 토니의 고백이었다. 너무 바빠서 잠 자는 시간도 거의 없고, 밥도 살기 위해 섭취하고 있을 뿐인 토니가 시간나는 대로 연락하겠다는 말을 쓴 것도 그렇지만, 마음이 아쉽다는 표현이 심장 근처의 어드메를 간지럽히는 느낌이 들었다. 비싼 만년필로 황급히, 하지만 정성들여 쓰고 나갔을 토니를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도, 나도 좋아하네. 토니."
-이제는 슬슬 그에게 좋아한다는 표현보다 약간 더 진지한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가까워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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