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그날은 모처럼 어벤져스 멤버와 쉴드 전원에게 주어진 달콤한 휴일이었다.
지구가 멈추는 날까지는 돌아가야 한다던 닉 퓨리도, 하늘과 땅이 뒤바뀔 정도의 사건이 터지지 않는 이상은 이 드문 휴식에 대해
번복할 생각이 없음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거기에 있던 모든 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환호성을 울렸고, 느긋하게 그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단체 휴식엔 으레 한 묶음으로 따라오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개인적인 시간은 보낼 수 없음' 이었다. 그들의 일이 워낙 보안을 중점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들을 위해 토니 스타크, 아이언맨은 어벤져스 타워의 파티 전용 홀을 통째로 내어주는 넓은 아량을 발휘했고 이때만큼은 누구도 토니의 행동에 트집을 잡거나 야유를 보내지 않았다. 높은 환호성과 휘파람, 부러움 섞인 가벼운 투덜거림만이 섞이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오늘은 당신도 마시라고, 캡틴.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콜렉션이 아니야."
"....자네완 다르게 술에 취할 수 없어도 말인가?"
"이 양반 좀 보게, 그럴수록 더 마셔야지! 아무리 마셔도 안 취한다니 그런 끝내주는 반칙이 어디 있겠어?"
얼음이 든 위스키 잔을 들고 와 건네며 토니가 한쪽 눈을 찡긋해보이자, 스티브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받아들었다. 넓은 파티 홀에 울려 퍼지는 적당히 리듬감 있는 음악과, 훌륭한 먹을거리, 그리고 한 눈에 보기에도 가격대가 달라 보이는 술들이 흥을 돋구어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젊은 애들의 클럽같은 그런 뜨거움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몇명씩 모여 조근조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느껴 보는 건 대체 얼마만인지. 스티브는 마치 어제처럼 아른거리는 그 날들을 생각했다.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운 그 시간은 기실 70년도 전의 일이라고 하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버린 스티브로서는 그저 황망할 뿐이었다. 그런 씁쓸한 기운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옆에 있던 토니로부터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와 스티브는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우리 캡틴이 혼자 노친네 행세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나랑 내기라도 할래?"
"내기라니.... 무엇을 말인가?"
"노인공경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걸로 하자고. 음- 술 마시는 건 내가 불리하니까 패스. 카드 두장의 합이 더 큰 쪽이, 작은 쪽에게 뭔가 하나를 시킬 수 있는건 어때? 물론 이상한건 빼고 말이야. 도덕적 기준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토니는 느긋하게 술잔 속 얼음을 돌려가며,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녹갈색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한가득 흘러넘치고 있었다. 평소같았다면 뭐라고 한 마디 정도는 딱딱하게 받아칠 법 하건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스티브는 묽어진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약간 짖궂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거..... 나쁘지 않군. 자네의 제안 치고는 드물게 마음에 들어."
"고도의 비유법이지? 상냥하기도 해라, 캡틴 로저스. 여기에서 아무거나 두 장 골라."
-간단히 말하자면, 승자는 놀랍게도 캡틴 아메리카였다. 토니의 카드는 그보다 숫자 1이 적었기에 간발의 차로 패배하고 말았다.
"맙소사. 이런 점수차로 져 본건 처음이야.... 운이라고는 해도 굴욕적이군."
"원래 진짜 승부란 이런 식으로 가려지는 법이지. 자네는 겪어보지 않았겠지만."
"Alright, Grandpa. What can I do for you?"
사실 그건 아주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스티브는 후에 그 순간을 회상하기를 마치 운명같은 어떤 것이었다고 말했고, 토니는 구식 로맨티스트라면서 혀를 내둘렀다.
"자네의 노래를 듣고 싶네."
"내가 못하는 건 세상에 없으니 뭐든지....... 뭐?"
"자네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싶다고 했네."
"......와, 캡시클, 캡틴, 스티브. 그거 진심이야? 노래를? 내가?"
"말해두네만 그 어떤 때보다 더 진심일세."
진중한 목소리로 확인 사살을 당한 토니의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아랫입술을 몇 번 잘근거리던 그는 결심한 듯 잔의 내용물을 깨끗하게 비우더니만, 허공에 손짓하여 연주되고 있던 음악을 정지시켰다.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돌아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토니는 성큼성큼 홀의 앞쪽으로 걸어나갔다. 거기엔 소규모 공연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당연히 마이크도 준비 완료 상태였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자네들은 오늘 횡재한 줄 알아,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희귀한 내 노래를 직접 감상할 수 있게 되었거든.]
토니는 손가락을 들어 그의 근처로 다가온 스티브를 가리켰다. 바로 저기 있는 캡틴 아메리카 덕분이지. 감사하라고.
(이 때 스티브는 토니가 실은 가운뎃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고 싶었던 건 아닐까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장내에는 약간 수근거림과 웃음소리, 그리고 기대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토니! 토니! 짧게 그의 이름이 연호되었다.
[신청곡 같은건 안 받아. 내가 좋아하는 거 부를 거야. 그래도 나름 노친네 취향에 맞춘 거니까 잘 들어.]
토니는 자비스에게 뭐라 지시를 내리고는 마이크를 고쳐잡았다. 홀의 조명이 천천히 어두워지며, 듣기 좋은 중저음이 그의 목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Time after time
I tell myself that I’m
so lucky to be loving you
so lucky to be
the one you run to see
in the evening when the day is through
I only know what I know
the passing years will show
you've kept my love so young, so new
And time after time
You’ll hear me say that I’m
so lucky to be loving you.
I only know what I know
the passing years will show
you've kept my love so young, so new
And time after time
You’ll hear me say that I’m
so lucky to be loving you.
토니는 노래를 부르며 몇 번 스티브를 바라보았고, 그 때마다 스티브는 제 심장이 그자리에 잘 붙어있는지 계속해서 확인해야만 했다. 토니 스타크의 목소리가 이렇게 듣기 좋았던가? 노래를 잘 하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감미로운 특유의 음성이 귓가에 달라붙어서는 도통 떨어지질 않았다. 은은한 조명 사이로 부드럽게 반짝이는 눈동자와, 가사를 읊는 입술, 그리고 리듬을 맞추는 약간의 몸짓 모두가 생생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스티브는 노래가 끝나갈 때 쯤에야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나는 사랑에 빠져버린 것 같다.
그것도, 저 토니 스타크를 상대로.
누가 볼세라 멍청이들마냥 벌어진 입술을 손으로 황급히 가리며, 다시 한 번 토니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반짝이는 조명 아래, 생생한 모습으로.
그리고 스티브는 다시 한 번, 제가 사랑에 빠졌음을 절감했다.
"와... 그거 엄청 로맨틱하네요."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수줍은 듯, 하지만 정말 기쁜 얼굴로 웃는 스티브에게 피터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여 보였다. 모두가 존경하는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가 사귀는 상대가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라니! 그것도, 고백한 사람이 캡틴이었다니! 너무 놀랍다 못해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새로운 멤버인 스파이더맨-피터 파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미 다른 기존의 어벤져스 멤버들은 스티브가 사랑에 빠지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어왔던 바람에, 그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으로 '둘이 사귀게 된 계기' 나 '왜 사귀는가' 에 대한 질문 및 이야기는 금기시되고 있었다.
"아, 토니!"
"헤이, 달링. 한참 찾았잖아. 저번에 그 보고서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데, 좀 와주겠어?"
"알았네. 음... 피터, 미안하네만 그럼 다음에 또..."
"아 네! 캡틴!! 저는 괜찮으니 가보세요!"
저렇게 좋을까. 세상을 다 얻은 사람마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토니를 따라 걸어가는 스티브의 뒷모습은 누가 봐도 훌륭한 팔불출이 따로 없었다. 그를 존경하는 피터였지만, 이럴 때만큼은 속으로 되뇌이고 마는 것이었다. 캡틴 아메리카가 저럴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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