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성은 놜(noir)님에게 바칩니다.


616 


 "미치겠군..."


 토니는 망설임없이 눈 앞의 편지지를 소리나게 구겨버린 다음 쓰레기통에 던졌다. 부드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최상급의 종이가 순식간에 폐기되는 모습은 일견 처량하기까지 했으나, 상대는 토니 스타크였다. 사치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자린고비처럼 아끼지도 않는 남자. 뭐든지 그 필요와 효용성을 알고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아는 그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편지지가 아니라 그 알맹이였다. 


 책상 한 켠에 작업이 완료된 서류를 쌓아둔 채로 장장 세 시간 동안 그의 휴지통에는 같지만 다른 종이 폐기물이 수북히 쌓여가고 있었다. 점 하나 없이 깨끗한 새 편지지를 내려다보던 토니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토니는 만년필로 책상을 가볍게 톡, 톡 두드리며 원인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아. 그래. 스티브에게 손으로 쓴 편지를..


 방황하던 손이 다시 종이 위로 내려앉았다. 거침없고 유려한 필기체는 금방 편지지의 줄을 채워나갔고, 토니의 눈빛은 아머를 수리하거나 다른 작업을 할 때보다 더 신중하게 반짝였다. 잠시 후, 수많은 시도를 거쳐 탄생한 몇 장의 편지지가 곱게 접혀 심플한 편지봉투 안으로 쏙 들어갔고 토니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보스? 뭐 해요?"

 "...만일 내가 심장 마비로 쓰러진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너야, 피터."

"말도 안 돼요! 노크했다고요, 세 번이나! 도통 답이 없길래 열었을 뿐인데!"

"난 두드리는 소리 못 들었어."

"토니, 피터는 확실히 노크했네. 소리가 작긴 했지만."


 억울하다며 항변하는 피터 뒤로,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티브." 그의 금발이 시야에 들어오기 전에 토니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편지봉투를 서랍 안에 밀어넣었다. "당신이 같이 왔을줄은 몰랐군." 태연한 어투로 말하면서도 토니의 눈은 책상 위와 쓰레기통을 빠르게 스캔하고 있었다. 만년필은 늘 쓰던 제품이고 남은 편지지는 서류 사이에 끼웠으니 사후처리는 거의 완벽하다고 봐도 좋았다. 모든 것을 확인한 토니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걸렸다.


 "저녁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잖나. 오늘은 내가 에스코트 하고 싶었거든."

 "오, 캡틴의 에스코트라니 영광인데? 피터, 마미랑 대디는 데이트 하고 올테니 집 잘 보고 있어."

 "잘 다녀 오세요~ 보스의 최고 기록 갱신해 놓을게요."

 "어림도 없을걸. 갔다 와서 보자고."


 너무 괴롭히진 말게. 스티브가 기분 좋게 웃으며 토니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뜨끈하고 단단한 손이 천 너머로 전해지는 감각은 제법 자극적이었고, 토니는 나지막히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목구멍 안으로 눌러 삼켰다. 아주 미세한 동요였지만 수퍼 솔져가 알아차리기엔 충분할 정도로 눈에 띄었다. 스티브가 뭐라고 토니에게 속삭이자, 토니는 도발적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서서히 두 사람의 그림자가 멀어져 갔다.  


 -후일담 1. 토니의 편지가 전해진 건 그 다음날 느즈막한 오후였다. 스티브는 도망치듯 걸어가는 토니의 뒷모습을 잡지 못했으나 20분 후 온 어벤져스 멘션을 뒤집은 끝에 용케 차 속에 숨은 그를 찾아내어 키스 세례와 뜨거운 밤을 선사했다. 


 -후일담 2. 편지 봉투에는 짤막한 단어들만이 있었으나 스티브는 이미 그것만으로 미소가 귀에 걸렸다.

                 Your Tony (얼마나 긴장했는지 필기체가 떨고 있었다)      To. Steve (반듯한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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놜님의 '사랑에 빠져서 평소에 안할 것 같은 일을 하는 게 좋다' 는 의견에 격하게 공감하며.. 

이렇게 연성하고 말았습니다. 616 토니의 경우 스티브에게 손으로 직접 쓴 편지를 주는 거죠. 

그것도 몇 장이나 쓰레기통에 버려가면서. 제목에 예고한 바와 같이 전기반입니다. 하하 무덤파는게 즐겁다

by 치우타 2014. 11. 24.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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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렴풋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문득 스티브는 눈을 떴다. 파도 소리? 그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토니와 폭탄을 든 채 접근해오던 빌런.. 그리고 번쩍이던 섬광, 폭발음이었다. 토니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스티브는 바로 근처에 앉아있던 토니와 눈이 마주쳤다. 무사했구나. 그는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일어났군. 다친 데는? 내가 보기엔 찰과상 몇 군데 말곤 없는것 같았는데..."

"아... 없네. 방패가 훌륭히 역할을 수행해 준 덕분에."

"다행이야. 깨울까 하다가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 몰라서 일단 이쪽으로 옮기기만 했어."

"여긴...."


스티브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도 소리가 들렸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온통 바다였다. 약간의 숲과 모래사장이 있었지만 당장 보이는 건 끝없는 수평선 뿐, 어디의 어떤 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스티브에게 토니는 별 일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가볍게 설명을 시작했다.


"걱정 마, 완전히 연결이 끊어지기 전에 조난 신호를 보내뒀거든. 자비스는 확실히 수신했고, 행크 쪽에도 정보가 갔으니까 지금쯤은 수색대를 꾸리고 있겠지. 빠르면 이틀, 늦어도 사흘 안에는 구조될거야."

"........"

"일단 날씨는 안정적인 편이지만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서 임시로 구조물을 짓는 것도.... 스티브? 괜찮아?"

"....아? 으음... 괜찮네."

"거의 넋을 놓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정말 어디 다친건 아니고?"


토니는 약간 파손된 수트를 걸친 채 스티브를 유심히 살폈다. 제법 곤란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가장 좋은 길을 제시하는 토니의 옆얼굴은 낯설면서도 무척 섹시하게 보였다. 스티브는 저도 모르게 말하는 것도 잊은 사람마냥 멍한 얼굴로 토니를 응시하기 바빴다. 걱정어린 눈길로 샅샅이 제 상태를 살피는 것이나, 이미 제 기능을 거의 멈춰버린 수트가 상당히 무거울 텐데도 난처해하는 기색 없이 동료(이자 연인)인 스티브를 생각하는 토니의 모습에 스티브는 또 다시 그를 갈망하는 욕구가 저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아, 그 표정은 안 되는데. 특히 여기선 안 돼, 스티브."


거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푸른 눈동자를 보고 금세 눈치챈 토니가 고개를 저으며 뒤로 두 발짝 정도 물러섰다. 분명한 거절의 몸짓에 스티브는 어쩐지 억울해지는 기분이었다. 둘 뿐이고, 섬이고, 큰 부상도 입지 않은 상태인데 안 된다니. 뭐가 문제라는 말인가? 생각만 한다는게 입으로 튀어나갔는지 토니의 잘생긴 눈썹이 팍 찌푸려졌다. 스티브가 뭔가 말하려던 순간 토니의 입술이 먼저 열렸다.


"뭐가 문제라니, 아주 많지. 첫째, 여기 무인도야. 아무도 없지만 동물은 살고 있을 거라고. 둘째, 우리 지금 조난당했어. 벌써 잊었다고 하진 마. 이 상황에서 아무 준비도 안 하고 그거부터 할 생각이야? 셋째, 오늘 새벽까지 날 놔주지 않은 사람이 누구였더라? 덕분에 난 하루 종일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침대에 눕기만을 기다렸다고. 그런데 빌런이 나타나서 출동하게 만들더니, 이젠 모든 전자기기가 먹통이 된 상태로 여기 뚝 떨어졌고 말이야. 내 상태가 어떨 것 같아?"

"그, 토니..."

"최악이야! 정말 최악이라고! 내가 그래서 그만하자고 했잖아, 하지만 당신은 들은 척도 안하고 비장의 무기로 애원하질 않나... 내가 거기 약하다는 거 다 알고 그러는 거지? 응? 스티브 로저스!"

"그렇다기보다는, 정말 자네를 놔주고 싶지 않아서..."


스티브는 황급히 토니의 팔(이라기보다는 수트의 손)을 붙잡고 변명하듯 늘어놓았다. 알고 그러는 건 사실이었지만, 토니를 놔주기 싫은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토니가 이렇게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풀네임까지 불러가며 속사포마냥 불만을 터트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스티브는 더욱 필사적인 얼굴이 되었다. 차마 잡힌 손을 뿌리치지는 못한 채 토니가 낮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내가 회사 일정을 말할 때는 왜 그런다고 생각해?"

"그건...."

"정말, 진짜로 바쁘기 때문이야. 당신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바쁘니까 미리 알려주는 거라고."

"....그렇...겠지. 알고 있네."


거의 억양이 없어지다시피 한 토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스티브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처음 깨어났을 때처럼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훌쩍 지나가버린 70년. 자신이 돌아갈 곳이 사라진 21세기.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허울 좋은 미사여구에 매달려 간신히 허덕이며 매일을 살아왔던 그 시간들. 꽉 쥐고 있는 수트의 서늘함이 피부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스티브는 자기도 모르게 추위를 느끼는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아직도 당신은 거기 갇혀 있구나. 내가 이렇게 옆에 있는데. 토니는 마음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을 구한 댓가로 삶의 대부분을 잃어버려야 했던 남자는 어지간히도 둔해서 말로 직접 해주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뻘의 연상이랑 사귀기로 한 건 내 결정이었으니 이 정도는 봐줘야겠지. 


"스티브."

"....."

"스티브 로저스, 캡틴 아메리카. 나 좀 봐줘."


토니는 최대한 부드럽고 상냥하게 부탁했다. 큰 어깨를 움츠린 채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있던 스티브는 그제야 망설이는 몸짓으로 얼굴을 들어 토니와 시선을 마주했다. 푸른 눈동자 속에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끝이 보이지 않는 외로움이 넘실대고 있었다. 눈 앞의 남자는 이 순간 캡틴 아메리카가 아니라, 그저 지독히 외로움을 타는 스티브 로저스였다. 


"당신이 여기 21세기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거, 알고 있었어."

"......!"

"처음에 우리가.. 그저 친한 동료이자 친구 사이일 때는 당신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잘 몰랐어. 하지만 이렇게 매일같이 살을 맞대고, 눈을 마주치고, 포옹을 나누고 보니 알겠더군. 당신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여기에 있으려고 하는지를.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어. 그래서...."


잠시 말을 끊은 토니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아 이걸 내가 말해야 하나, 아니 그래도 결심을 했으니 해야지. 굳이 말로 해야 돼? 혼자 알아듣기도 어려운 말을 중얼중얼거리던 토니는 결국 단단히 마음먹은 듯 입술을 꾹 물었다. 어쩐지 결연한 의지가 보이는 그 모습에 스티브는 공연히 목이 타는 걸 느꼈다. 


"...그래서.. 당신에게 만들어 주고 싶었어. 여기 있어도 된다고, 내가 옆에 있어주겠다고..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장소를, 땅에 발을 붙이고 마침내 마음도 의지할 수 있는 곳을. 당신이 그리던 40년대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저녁에 불이 켜지면 함께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햇살이 떠오르면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할 수 있는.. 집과 같은 곳을 말야."

".......토니..."

"난 이런 말 진짜 못한다고. 해본 적도 없거니와... 솔직히 지금도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완전 패닉 상태거든. 하지만 내 구식 연인을 위해서 있는 힘껏 노력하고 있지. ..이 이상 말하면 얼굴이 아주 빨갛게 익다 못해 폭발할지도 몰라."


토니는 천천히 팔 부근의 수트를 해제했다. 스티브의 손 안에 있던 부분마저 모래사장 위로 툭 떨어지고 나자, 차가운 금속 대신 얇은 이너수트 너머의 따스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순간 스티브의 마음 안쪽에서 뜨거운 감정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토니의 말대로였다. 자신이 있을 장소를 어떻게든 찾고 싶었다. 누군가가 붙들어 매 주기를 원했다. 또 다시 전혀 모르는 세상에 홀로 뚝 떨어져서 외톨이로 남겨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계를 시험하듯 토니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그때마다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초조해하며 기다렸었다. 약한 속내를 드러내기 싫어서 비열한 방법으로 연인을 몰아세우고 있었으면서도, 버려질까봐 무서워하고 있었던 건 자신이었다. 하지만 토니는 다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스티브가 말해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넓은 자리를 내어주며 감싸 안기까지 했다. 대체 어디까지 사랑스러운 사람인가. 스티브는 눈 앞이 흐려질 것만 같아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토니."

"응? 스티브."

"....사랑해.. 사랑하네."


하고 싶었던 수많은 말을 뒤로 한 채, 스티브는 그 말만을 되풀이하며 토니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든든하게 안아오는 팔과 어깨는 더 이상 떨고 있지 않았다. 토니는 나머지 수트도 전부 해제시키며 스티브의 등에 팔을 둘렀다. 뜨거운 포옹 사이로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스티브는 오롯이 토니의 체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Here, is my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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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H 스토니로 조난당한 두 사람, 늠름한 토니, 짜증내는 토니, 그리고 약간 에로한 장면까지... 라는 리퀘를 다키님으로부터 받고 쓴 글입니다. 하하 무려 한달이나 됐네요 이런 죄인가트니... orz 구상하느라 늦었다는 변명을 드립니다 (넘

전기반의 스티브 중에서도 유독 위태로워 보이는 게 EMH 스티브라고 생각되서 이렇게 주제를 잡아봤습니다만 어떠셨을지 모르겠네요. 모든 스티브가 홀로 뚝 떨어지긴 했는데 그래도 원작이 제일 탄탄하고 무비는 살짝 휘청하긴 해도 그럭저럭 괜찮고.. EMH는 The man out of the time 을 보면서도 왠지 쓸쓸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토니가 옆에서 든든하게 있을 곳을 만들어주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다가... 다키님이 좋아해 주신다면 전 그걸로 무척 기쁠거에요.

그럼 전 이만 밤이슬을 맞으며 총총.....


by 치우타 2014. 10. 23. 0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