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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스릴러물이었다. 심리적인 긴장감과, 추리, 범인의 역습과 주연 인물들의 아슬아슬한 대처 등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영화였다. 이건 꽤 괜찮네. 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가 끝난 후 저녁식사는 분위기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졌고 둘은 와인을 곁들여서 적당히 기분 좋게 마셨다. 에릭은 와인을 마시며 뺨이 발갛게 상기되는 찰스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어스름이 내려와 밤이 찾아온 다음부터, 에릭의 눈에는 찰스가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첫 만남이 원나잇이었던 만큼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거기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술기운을 즐기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는지 찰스는 꽤 조용했고, 그 덕분에 에릭은 운전하면서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는 그의 흰 피부나 붉은 입술을 힐끔거렸다. 에릭의 아파트에 도착해서 카드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찰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와, 의사라 그런지 남자가 혼자 사는 집 치고는 무척 깨ㄲ...히익!"
말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고 찰스가 깜짝 놀라 신음을 울렸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안고 있었다.
"에, 에릭?"
찰스는 꽤 당황하고 말았다. 이걸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설마 아침에 보자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에릭의 손이 셔츠 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맙소사, 그런 모양이군. 그를 말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몸이 먼저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찰스는 금세 목 부근을 헤치고 이를 세우는 에릭의 팔을 일단 꾹 붙잡았다.
"잠깐요, 에릭. 일단 나 할 말이 있어요."
"....무슨 말."
"오늘의 컨설팅은 아까 저녁식사까지로 하죠."
약간 모호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에릭은 이해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낮게 속삭였다.
"철저하군."
"난 공과 사는 제대로 구분하자는 주의라서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키득거린 두 사람은 곧장 침대로 직행했다. 내일은 일요일이었고, 거기다 찰스는 자고 가는 게 확정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에릭은 거의 작정한 사람처럼 찰스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첫 만남 때 혼자 아침에 눈떴던 경험은, 솔직히 말하자면 상당히 별로였던 데다가 낮의 자신만만하고 활달하던 컨설턴트가 침대 위에서는 이렇게 자신에게 매달려서 울고 애원하고 있다는 갭에 묘한 쾌감도 느끼고 있었다. 대신 오늘 에릭은 착실하게 콘돔을 사용했다(찰스는 집에 대체 몇 개를 놓아두고 있느냐며 혀를 내둘렀다). 새벽까지 이어지던 섹스는 여섯번째인가 일곱번째에 찰스가 절정을 맞고 그대로 기절함으로써 겨우 끝이 났다. 에릭은 다 쓴 콘돔을 쓰레기통 쪽으로 휙 내던지고는 정신을 잃은 찰스를 품에 끌어당겨 안고 자신도 잠을 청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를 이렇게 안고 자는 것도 처음인 것 같은데. 애매하게 깜박이는 정신 속에서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가 금방 가라앉았다.
다음날 먼저 눈을 뜬 건 찰스 쪽이었다. 온 몸이 뻐근한 감각과 함께 햇살이 피부로 닿아오는 걸 느끼며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리자, 눈 앞에는 마른 근육으로 탄탄하게 짜여진 에릭의 가슴이 있었다. 그걸 보며 찰스는 멍하니 지난밤을 회상했다. 기억이 끊어진 것 같은데. 지난 수요일에 했던 섹스보다 더 끝내주는 몸 상태가 됐겠군. 살짝 다리를 움직이자 허벅지에서 허리까지 묵직한 통증이 내달렸고 찰스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딱 죽을 맛이네. 컨설팅은 정신력으로 버텨야겠는걸. 일단 씻어야 될 것 같아서 에릭의 팔을 풀기 위해 꿈지럭거리는데, 더 꽉 끌어당겨지는 걸 느끼며 찰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가."
"샤워하러요."
"가는 게 아니고?"
"에릭. 난 여기 컨설팅을 위해 남은 거에요. 어제 섹스랑은 상관없이."
찰스가 달래듯이 말하자 에릭은 그제서야 순순히 팔을 풀어주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통증을 호소하는 허리 때문에 몇번이고 미끄러질 뻔 했지만, 어떻게든 욕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따뜻한 물을 맞으며 찰스는 에릭의 방금 전 행동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그런 건 애인한테나 하는 행동인데 왜 나한테 한 걸까. 그냥 그러고 싶었나? 아니면 전에 먼저 갔다고 삐졌다던가. 찰스는 불퉁한 표정을 짓는 에릭의 얼굴을 상상하며 큭큭거리고 웃었다. 그런데 팔 힘은 진짜 세긴 하더라. 괜히 가슴이 설렐 정도였... 미쳤어 찰스 자비에. 정신차리시지. 찰스는 붉어진 뺨을 때려가며 물을 차가운 걸로 바꿨다. 앗 차거! 샤워실 내에 그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얼굴이 왜 그래?"
"....그냥 좀 부딪쳐서 그래요."
"어디 봐봐."
"됐으니까 샤워하고 나와요. 부엌 좀 써도 되죠?"
"어지르지 말고."
"누가 애인줄 아나 참..."
에릭이 샤워하는 동안 찰스는 베이컨을 굽고, 따끈한 오믈렛을 만든 다음 바삭한 토스트를 구워냈다. 늘 바쁘고 귀찮다는 핑계로 대충 먹거나 레토르트 식품을 애용하던 에릭으로서는 무척이나 감동적인 아침 식사였다(그런 사람 집에 식료품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네요, 라고 찰스가 중얼거렸다). 밥을 다 먹고 난 다음 찰스는 에릭에게 양해를 구하고 옷장을 활짝 열어서 체크했다.
"오.... 에릭.........."
"왜?"
"이건, 정말... 그러니까...... 이게..."
"말을 해."
"정말 당신 옷장.... 맞죠? 아버지 거라던가 할아버지 거라던가.....?"
"여긴 내 집이야."
"...........For god's sake..."
어정쩡한 중년 아저씨의 옷장도 이것보다는 나을지도 몰라. 찰스는 머리를 감싸쥐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양복이 제일 봐줄만한 거였다니, 맙소사. 신이시여.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연극을 하듯이 과장된 어투로 마음 속으로만 그런 말을 외치던 찰스는 비장한 얼굴을 하고 돌아서서 에릭을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는거야. 무섭게."
"에릭. 나랑 당장 나가요."
"뭐?"
"나가자구요. 안 되겠어, 이건 너무 심각해요. 그리고 이 옷들.. 아니다. 일단 쇼핑부터. 옷 입어요, 지금 당장. 차키도 들고."
by 치우타
2011. 11. 24.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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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의 차에 올라탄 두 사람은, 아니 정확히 에릭은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걸어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전에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말했다. "어디로 가지?" 찰스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데이트의 주도권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거에요, 에릭." "...좋아." 별로 생각해둔 곳은 없었지만 인스턴트적인 관계를 가지던 이들과 가던 장소들 중 몇 군데는 아직 기억에 남아 있었다. 에릭은 운전을 하면서 조수석에 앉은 찰스를 조금씩 힐끔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밤에 봤을 때와 밝은 낮에 보는 것은 전혀 느낌이 달랐다. 옷차림도 그렇지만 눈빛이나 말투가 확연히 차이가 나고 있었다. 바에서 만났을 당시에는 좀 더 유혹적이면서도 대담하고, 상대를 끌어당기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차분하면서도 쾌활하고, 예의바른 분위기였다. 잘 배우고 자란 도련님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무슨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 같군. 낮에는 젠틀, 밤엔 섹시라니.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피식 웃고 있는 동안, 그걸 보던 찰스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좀 실례해도 되죠?"
".....밑도끝도없이 무슨 소리야."
"셔츠가 답답해서요."
에릭은 그제서야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 찰스의 드레스 셔츠를 힐끗 바라보았다. 전에는 오픈형이었지. 그와 동시에 희고 유려한 선을 가진 목덜미가 떠올라 에릭은 재빨리 그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좋을대로."
에릭의 허락(?) 이 떨어지자 찰스는 반색을 하더니 단추를 하나만 풀러내리고 큰 숨을 탁 토해냈다. "아, 이제야 살겠네..." 그 말을 듣고 에릭은 다시 찰스를 바라보았다. 겨우 그 정도로 저렇게 해방된 표정이라니. 답답한 걸 싫어하는 건가. 그러면 왜 저렇게 입고 온 거지? 갑자기 물음이 고개를 들었다.
"굳이 그렇게 입고 올 필요가 있었나?"
"클라이언트와의 만남이니까요. 카페 자체 성격도 있고. 거기다...."
말끝을 흐리는 찰스를 보고 에릭은 한 쪽 눈썹을 위로 쓱 치켜올렸다. 뭔가 켕기는 듯한 말투였다. "거기다?" 답을 재촉하기 위해서 일부러 목소리를 한 톤 낮추며 되묻자, 돌아온 것은 의외의 말이었다.
"이런 걸 백주대낮에 자랑하고 다닐 순 없잖아요?"
마침 신호는 빨간불이었고 에릭은 '이런 게' 뭔가 싶어서 찰스를 쳐다봤다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 했다. 흰 목줄기를 중심으로 쇄골 근처까지, 몇 개의 붉은 울혈들이 자신의 존재를 과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희미하지만 이빨 자국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에릭은 순간 어이가 없고 황당한 가운데서, 이유모를 분노가 쾅쾅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연 그를 찰스가 먼저 가로챘다.
"오해할까봐 말해두는데 이거 범인 당신이에요."
에릭이 얼빠진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찰스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가 섹스한 건 수요일 밤이었어요. 덧붙여서 에릭, 진짜 집요하게 물어뜯었던 거 알죠? 난 상어한테 먹히는 줄 알았다니까요. 세상에." ..... 그러고 보니 흰 피부에 남는 자국이 마음에 들어서 집착하듯 두 번씩 깨물고 핥았던 게 기억났다. 에릭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고, 찰스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 알았어요?"
".......음."
결국 찰스의 셔츠는 그 상태로 놔두는 데에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고, 점심 식사를 위해 도착한 곳은 전형적인 아메리칸 키친이었다. 뷔페식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자유로운 식사 분위기였지만 사람의 습관이란 쉽게 떨쳐낼 수 없는 것이기에 찰스는 에릭의 테이블 매너를 꼼꼼하게 체크했다. 우아하게 의자에 앉은 자세부터, 손놀림, 식사 예절, 상대방에 대한 매너까지 나무랄 데 없이 완벽했다. 교육받은 자제의 느낌이라고 하기엔 약간 딱딱했지만 오히려 그것때문에 절제된 동작이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신경외과는 뭐 하는 데에요?"
"사람의 신경계를 다루지."
"어려울 것 같은데...."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야. 장단점이 있어."
에릭은 그닥 말이 없는 타입이었지만 이야기를 들어야 그에 대해서 더 파악하기가 쉽기 때문에 찰스는 종종 질문을 던지거나 화제를 꺼내 대화를 이끌어냈다. 에릭은 찰스가 툭 던져오는 질문이나 화제에 그럭저럭 잘 응해주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침묵이 찾아오면, 둘 다 별다른 생각 없이 그 시간을 즐기기도 했다. 신기하군. 에릭은 지금까지 데이트(라고 할 수 있다면)를 하며 대화가 단절되는 순간이 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안 그래도 무기질적인 관계에 어색함까지 더해져서 참기가 힘들었는데, 찰스와는 오래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무척이나 편안했다. 오래된 연인이라는 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군, 하고 잠깐 생각하던 에릭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 문장을 마음 속 저 밑으로 재빨리 구겨넣었다.
식사 후에는 찰스의 제안으로 백화점에 들렀다. 에릭이 평소 어떤 스타일을 입는지 궁금하다면서 그의 손을 거의 잡아끌던 찰스는 그에게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보라고 옷들을 향해 손을 쓱 펼쳐보였다. 에릭은 별 희안한 걸 다 시킨다며 황당해 했지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옷을 골랐다. 눈을 반짝이며 그걸 지켜보던 찰스는 점점 표정이 굳어지더니 결국에는 경악한 얼굴을 하고 에릭을 바라보았다.
"...what?"
"그거, 진심이에요?"
"골라보라며."
찰스는 마음 깊은 곳에서 끄집어 낸 듯한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는 옷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영화관으로 가는 차 안에서 찰스는 내내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건 정말 강수가 필요하겠어. 어림짐작이 맞아떨어졌고, 80%정도 확신이 섰으니 남은 건 직접 가서 확인하는 일만 남았군. 마침 주말이고 하니까 기회도 좋고. 한편 에릭은 그렇게 찰스의 생각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 표정을 보며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뭐야, 신경쓰이잖아. 그리고 그때 찰스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에릭. 내일 약속 있어요?"
에릭은 머릿속에서 자신의 스케줄 수첩을 좌라락 펼치며 확인해보고 대답했다.
"아니, 없어."
"그럼 오늘 나 좀 재워줘요."
찰스의 폭탄발언에 에릭은 액셀 대신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 했지만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고 그 상황을 속도를 줄이는 것으로 해서 부드럽게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입을 통해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동요가 실려 있었다.
"....왜."
"컨설팅의 일환이에요. 당신 평일엔 바쁘잖아요? 나도 들쑥날쑥하거든요. 제일 중요한 것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
"그게 뭔데?"
"내일 아침에 말해줄게요."
그래서 yes or no?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찰스를 보며 에릭은 아주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대체 뭘 하자는 건지도 궁금했지만, 재워달라는 뉘앙스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걸 어떡할지 고민하는 것 보다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좋아. 재워주지."
"oh, how nice of you, Erik."
긍정의 대답에 찰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동작으로 감사를 표했고, 에릭은 전혀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며 마주 씩 웃어보였다. 천만에. 오히려 그 말은 내가 해야될 것 같은데, 찰스. 말이 되지 못한 생각의 꼬리표는 한 바퀴 그의 머리를 돌고 자취를 감추었다.
by 치우타
2011. 11. 21.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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