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 달에 한 번 정도 얼굴은 보는 걸로 할까. 딱 좋을것 같은데, 어때?
토니의 제안은 퀼에게도 아주 반가운 것이었다. 둘 사이에 있는 거라곤 가벼운 농담과 성적인 대화, 그리고 섹스였다(가끔 우주와 지구 사이에 관계가 생기면 진지한 이야기도 필요했지만). 그들은 하루이틀 안 본다고 해서 안달이 나는 뜨거운 연인사이도 아니고, 주말엔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부부도 아니었다. 그냥 만나서 대화하고, 웃고, 섹스를 나누면 그만이었다.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는 쿨한 사이. 토니는 이걸 파트너쉽이라고 칭했으나 퀼은 그것보단 더 좋은 호칭이 있지 않겠냐면서 30분 정도 고민했다. 기다리다 지친 토니가 셔츠 단추를 풀지만 않았어도 아마 계속 고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나기로 한 시일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던 토니로부터 통신이 들어온 건 조금 전이었다.
[미안한데 여기가 너무 바빠서 말이야. 손을 뗄 수가 없군. 한동안 못 볼것 같아.]
"자기야, 그럼 연락이라도 했었어야지. 보고 싶어서 목 빠지는 줄 알았어."
[어디까지 빠졌는지 보여주면 당장 날아갈게.]
짐짓 심각한 얼굴로 엄살을 피우는 퀼에게 토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둘 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의 일이었다. 퀼이 바빠서 시간이 안 날때도 간혹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토니가 무척 바쁜 사람이다 보니 약속이 깨어지거나 미뤄지는 건 흔한 경우였다. 퀼은 그때마다 애처럼 칭얼대며 아쉬워했지만 뒤로는 다른 여자를 꼬셔내어 뒹굴었고, 토니는 그걸 눈치채고도 삐진 것마냥 말다리를 걸곤 했다. 섹스 한두번이면 잊어버릴 만한 것들로.
"시간 될 때 연락해. 지구가 위급해도 연락하고."
[오, 네 도움을 받을 정도면 이미 늦은 다음일걸. 그리고 콘돔은 꼭 쓰고 다녀.]
"와우, 마미. 아들은 다 컸으니 걱정 마세요."
[엄마는 늘 걱정이란다, 아들. 다음에 봐.]
화면이 툭 꺼지자 퀼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얼마 전에 들렀던 행성의 바에서 아주 섹시한 여자 하나를 꼬셨었는데, 전화번호가 어디 있더라. 로켓이 정말 내 방을 날려버릴 기세였으니 우주선엔 데려오지 말아야지.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옷을 뒤적여 물에 번져 엉망이 된 종이조각 하나를 찾아냈다. 망할. 퀼은 미련없이 그것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또 찾지 뭐.
토니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은 지 세 달째가 되어서야, 퀼은 스스로가 이상하게 굴고 있다는 걸 드디어 인정하기로 했다. 이미 오래전에 우주선의 다른 멤버들은 그가 또라이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몇 번이나 지적했지만(가모라는 식사를 하다 말고 다리를 떨며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는 그를 보며 말했다. "너 정말 머저리 같아."), 정작 당사자는 난 멀쩡하다며 바락바락 우기고 있었던 것이다. 퀼이 인정하자 우주선에는 약간의 평화가 돌아왔다. 아주 약간이었지만.
말했다시피, 퀼은 지금 무척 기분이 안 좋았다. 그게 언제부터였는가 생각해보면 빌어먹게도 토니 스타크와 연락이 끊긴 다음부터였다. 도대체 왜? 퀼은 방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침대위를 굴러다녔다. 그들 사이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 것도! 그게 지금 퀼을 초조하고 화나게 하고 있었다. 이유라도 알면 해결이나 하지. 그는 아랫입술을 질겅거리며 천장을 노려보았다. 난 지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 그가 중얼거렸다.
토니와 연락이 되지 않는 동안에도 여자들을 만나러 몇 번이나 나갔지만 거의 다 꼬실 즈음이 되면 일이 터지거나 퀼 자신이 흥이 식어버려서 분위기를 망치곤 했다. 이게 욕구불만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섹스를 한 번도 안한건 아니었다. 재미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럼 대체 뭐란 말인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쾌함, 초조함이 잔뜩 쌓여서 배 안에 꼬인 듯한 느낌이었다. 평소에 원만한 성격으로 멤버들의 트러블을 조정할 만큼 여유로운 퀼이었지만, 지금 그는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라 작은 것에도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이상한 노래를 틀어댔다. 이 미친 또라이자식아, 그만 좀 해! 참다못한 로켓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직접 개량한 레이저 건을 꺼내들자, 퀼은 흉흉한 얼굴로 헬멧을 뒤집어썼다. 일촉즉발의 사태를 말린 건 그루트였고, 이 일을 계기로 멤버들은 퀼이 정말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에겐 해결책이 필요했다.
바로, 토니 스타크가.
토니는 마지막 서류철을 꼼꼼히 읽어보고 사인을 마친 다음, 의자에 푹 기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어벤져스 일부터 시작해서 회사 일에, 도무지 손을 뗄 수 없는 것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바람에 그는 오늘 하루종일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그나마 토니의 안 좋은 습관을 알고 있는 페퍼나 스티브가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반강제로 뭔가를 먹인 덕분에 잠도 자지 않고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푸르며 토니는 불현듯 우주에 떠 있을 금발의 철 없는 양아치 파트너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벌써 세 달째 목소리도 못 들었군. 여자들하고 잘 놀고 있겠지. 마지막으로 봤던 진지한 얼굴을 생각하니 웃음부터 나왔다. 순간, 여러 개의 발소리가 문 근처에 다가왔다. 토니는 반사적으로 몸을 긴장시키며 수트를 부르기 위해 손을 뻗었다. 콰앙! 문이 거칠게 열리고 나타난 얼굴들은... 맙소사. 우주의 친구들이었다.
"로켓? 그루트에, 드랙스까지? 뭐야, 왜 갑자기..."
"설명할 시간 없어, 스타크. 우린 아주 급하거든. 잠이나 자둬."
"무슨.... 윽."
로켓은 토니에게 마취총을 쏘았고 허를 찔린 그는 그대로 책상에 무너졌다. 이게 다 공공선을 위해서야, 스타크. 너도 휴가가는 셈 쳐. 의식을 잃어가던 토니에게 뭔가 들려온 것 같았지만 꿈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토니는 그대로 짐짝처럼 그루트에게 들려져서 우주로 향했다.
".....으으..."
토니는 묘하게 불편한 자세라고 생각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뭔가 단단한 것이 그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몸을 조금씩 뒤척이듯 움직이려고 해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몇 번 눈을 깜박이며 수마를 쫓아내고 나서야, 그를 안고 있는 건 금발머리의 무언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퀼?" 가라앉은 목소리로 토니가 말했다. 미동도 않던 몸이 움찔 떨렸다.
"토니."
"이게 뭐야... 여기 우주야? 무슨 일이라도 났어?"
"난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어디 행성이 멸망하기라도 한대? 왜 갑자기 납치같은 걸..."
"나한테 절대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고. 아무리 상대가 우주 최고의 섹시미녀라고 해도."
토니는 눈썹을 찡그리며 퀼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얘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내가 잠이 덜 깼나? 아니면 이게 꿈 속인가? 토니는 살짝 입술을 씹어보았다. 치아의 감촉이 생생했다. 꿈이 아닌 것 같은데. 토니는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기로 했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봐, 피터 제이슨 퀼. 잠꼬대 그만 하고." 퀼이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어 토니를 올려다보았다. 푸른 눈에는 원망과 애정, 혼란스러움이 뒤섞여 일렁이고 있었다. 덩달아 토니도 혼란스러워졌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잖아."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때문이라니?"
"지금 말하면 제대로 안 나올 것 같아서 싫어."
기실 토니의 인내심이란 아주 얇은 종이조각에 비유되곤 했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잖아, 피터. 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지금도-" "보고 싶었어." 말 끝을 잘라먹고 튀어나온 대답에 토니의 입이 경악으로 쩍 벌어졌다.
"....뭐라고?"
"보고 싶었어, 토니 스타크. 빌어먹을. 당신이 보고 싶었단 말이야. 나도 이해가 안 되지만, 그랬다고. 이제 시원해?"
퀼은 말을 마치고 숫제 사탕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잔뜩 억울하고 분한 얼굴로 토니를 바라보았다.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에 토니는 비틀거리고 싶었으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는 퀼의 팔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늘상 둘이 주고받는 그런 보고싶었다는 단어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언론에 노출되어온 천재는 사람의 말 속에 숨겨진 거짓을 파악하는 기술에 능통한 만큼, 감정이나 어떠한 변화에도 무척 민감했다. 언제나 온 우주를 돌며 하반신을 휘두르고 다니던 이 나이 어린 난봉꾼이 진심을 던진 것이었다. 토니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당장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금발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퀼이 한숨을 내쉬었다.
"....할래?"
평소의 토니라면 절대 내뱉지 않을 지리멸렬한 대사였지만 지금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지치고, 피곤하고, 또 반쯤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 특히나 퀼은 토니의 온도와 체향에 잔뜩 파묻혀서 이제야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있었다. 대답 대신 입술이 찾아들어오는 걸 느끼며 토니는 푸스스 웃었다. 이 강아지를 어떻게 할 지는 좀 나중에 생각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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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Lady Gaga - Bad Romance 에서 따왔습니다. 이 노래 토니가 부르면 어울리지 않나요? 딱인듯
그리고 소재는 탱고님으로부터. 원고하느라 바쁘신 탱고님께 바칩니다. 흐흑 넘 모자란 연성이라 죄송할따름..
여러분 퀼토니 파세요 (찡긋찡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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