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실 퀼은 우주로 납치된 이후로 자기 생일을 제대로 챙겨본 적이 없었다. 라바저들이 그런걸 신경써줄 리가 만무했고 (게다가 퀼은 잡아먹느니 어쩌니 하던 그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어렸던 퀼이 생존과 적응을 목표로 잡은 다음부터는 생일이란 그저 추억 속의 따스한 기억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퀼은 자신이 서운함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토니의 프라이빗 룸 소파에 앉아 있었다. 토니는 바쁜 사람이었고 가능하면 늘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 고개를 드는 섭섭한 감정마저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순 없었다.
"미안해, 대신 내일은 하루종일 비울게."
거기다 토니는 보기 드물게도 진심으로 눈썹을 늘어뜨리며 사과해왔다. 먼저 데이트 약속을 정해놓고도, 제 쪽에서 바람을 맞히게 된 상황에 토니는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토니 스타크가! 처음 사귈때만 해도 퀼이 먼저 적극적으로 들이대며 우주 무법자(그것도 연하)를 사귀는 것에 회의적이고 시큰둥했던 토니에게 정말, 열정적으로 어필한 덕분에 축 연인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퀼은 아주 조금 마음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내 층에서 조금만 기다려. 저녁엔 갈게. 아니, 자정 전까진 꼭 들어가 볼테니까."
"알았어요, 토니. 나도 한동안 우주에 일정은 없으니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윽, 정말 가봐야겠군. 키스나 해."
타박하는 듯한 명령조에 퀼은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토니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했다. "얌전히 있어야 돼, 자비스 말 잘 듣고." 무슨 어린애라도 하나 두고간다는 듯이 잔소리를 덧붙이던 토니가 금세 멀어졌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퀼은 축 처진 강아지마냥 풀이 죽은 얼굴로 그대로 주저앉아 멍하니 자비스가 틀어주는 영상을 바라보았다. 생일 같은 건 역시 별 의미 없는 날이지. 그는 천천히 눈이 감기거나 말거나 내버려두었다.
"맙소사, 얘 지금 자고 있는 거야?"
[중력 적응이 잘 안된다는 식으로 중얼거리신 것 같긴 합니다만.]
"누군 기다리게 한 것도 미안해서 수트 입고 날아왔더니... 일어나, 퀼."
"....으으음..."
몸을 뒤척이며 눈살을 찌푸릴 뿐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퀼을 내려다보며 토니가 한숨을 쉬곤 넥타이를 헐겁게 풀었다. 자정이 되기 1분 전인데, 이 태평한 연하 꼬맹이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군. 지구 플레이보이의 기술이라도 보여 줄까? 토니는 잠깐 목을 다듬더니 이젠 엎드린 퀼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일어나, 피터."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퀼은 잠이 남아있던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완전히 정신을 일으켜 세웠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그는 눈을 몇 번 깜박이며 자신이 깨어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토니..?"
"그래, 잠꾸러기씨. 이제 정신이 좀 들어? 일어나. 자정 넘어버렸다고."
"벌써 시간이 그렇게.. 잠깐, 내가 계속 잤어요?"
"자비스 말로는 그랬다던데.. 영상 보다가 잠들고는 몇 번 뒤척이기만 했다고."
"와.... 세상에. 어쩐지 배가 너무 고프더라."
토니는 질렸다는 듯 피식 웃으며 퀼의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무슨 겨울잠 자는 곰도 아니고, 사람이 시간 맞춰서 왔더니 말이야. 뭐 어쨌든 시간이 넘었어도 할 건 해야지." "침대로 가자고요?" 천진한 물음과 함께 자연스레 허리를 감싸오는 손을 토니가 찰싹 때렸다. "넌 그거 생각밖에 없어? 그 전에 다른 게 있잖아." 다른 거라니, 자신을 만나기 위해 헐레벌떡 귀가한 연인과 할 일이 섹스 말고 또 뭐가 있단 말인가? 퀼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있군. 아직 신선하네, 주문 제작한 보람이 있어. 자.. 불을 켜고."
"어? 케이크?"
"바보 같긴, 네 생일이잖아? 고마운 줄 알라고. 이런거 챙겨준 적 없었어. 난 내 생일도 가끔 잊어버리거든."
토니는 허리에 단단히 감긴 퀼의 팔을 풀기 위해 무던히 애썼으나, 곧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나란히 옆에 앉아 생일 축하곡을 불러 주었다.
"Happy birthday to you~ Happy birthday to you~ Happy birthday dear.. Peter. Happy birthday to you!"
퀼은 토니의 약간 덤덤한 노랫말 속에 숨겨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피터. 한 번도, 심지어 침대에서 몸을 섞을 때도 불러준 적 없던 제 이름이었다. 지금까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토니의 입을 통해 듣고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간지럽고, 몸이 배배 꼬이고, 낯설지만 익숙한.. 그리고 따뜻한 느낌. 이제껏 다른 사람이 불렀을 때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이게 뭐지. 퀼은 초가 녹아가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토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케이크 망치겠다, 빨리 꺼! 내가 불면....읍."
토니의 뒷 말은 이어지지 못한 채 그대로 퀼의 입 안으로 먹혀 들어갔다. 평소보다 더 뜨겁고, 열렬한 입맞춤이었다. 이 꼬맹이가 갑자기 왜 이러지? 토니는 널찍한 등을 슬슬 쓰다듬으며 급한 키스에 얌전히 응해 주었다. 그게 더 불을 붙였는지, 퀼은 아예 토니를 소파에 눕히고 한동안 입술을 떼지 않았다. (결국 숨이 막힌 토니가 등을 후려칠 때까지 말이다)
"후아, 하아... 하아.. 맙소사, 초가 거의 다 녹았잖아! 너 갑자기 왜..."
"사랑해요."
"....허어?"
토니는 이번에야말로 이게 미쳤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퀼을 올려다 보았다. 촛불의 빛이 일렁이는 얼굴에는 평소에 찾아보기 힘든 진중함이 어려 있었다. 아, 이거 위험하군. 토니는 이런 얼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청년의 얼굴이었다. 그것도 제법 진지하게. 여러 가지 이유로 속내를 감추는 것에 능했던 토니가 결코 퀼에게 들킨 적 없는 또 다른 얼굴이기도 했다. 너까지 이러면 우리는 이제 정말 큰일나는 건데. 토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서서히 차오르는 기쁨에 미소를 지었다. 퀼이 다시 한 번, 입술을 가볍게 부딪치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생일 축하해, 피터 제이슨 퀼. ...나도 그래."
퀼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토니를 와락 끌어안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던 토니가 불안한 예감을 느끼며 말했다. "잠깐, 너 촛불도 안 끄고.. 설마 아니겠지?" "난 그것보다 당신이 더 급해요. 지금 당장." 그러고는 바로 등을 돌려 침실로 척척 걸어가버리는 것이다. 토니는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다.
"야, 너 저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이 날을 위해서 특별히...!"
"케이크가 그렇게 먹고 싶으면 이따가 먹여줄게요. 물론 나도 먹을 거지만."
"너 지금 야한 생각 했지? 아, 타임! 나 피곤하단 말이야!"
"걱정 마요. 아침에 실컷 재워줄게요."
"사람이 말하면 좀 들어!!"
토니가 몸을 버둥거리며 외치거나 말거나, 퀼은 멈추는 일 없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잠시 후 침실의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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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러니까 2월 4일이 코믹스 기준이긴 해도 퀼 생일이라기에 원래는 어제 쓰려고 했지만
제 최애가수 마이클 부블레 공연에 다녀오느라 ㅋㅋㅋㅋ 끝나고 집에오니 시간도 넘고 졸리고 해서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만 어쨌든 썼으니 된거겠죠!!!! 하하 생일 축하해 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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