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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 좀 더 내봐. 이것밖에 안 돼?"
"몇 번을 말했지만 이거 니 비행기야, 이 얼간아! 최고 속도로 가는 중이거든? 눈은 장식이냐?"
로켓의 폭언을 듣고서도 퀼은 쉽사리 조종간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일이 길어지는 바람에 사흘은 무슨, 거의 일주일 가량을 지구에서 떨어져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토니와 어떻게든 음성으로 연락을 주고받는건 가능했으나 묘하게 가슴 한 구석에서 기분 나쁜 예감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게다가 어젯밤 대화를 나눌 때 주위가 제법 시끄러웠기에 물어봤더니 '새 식구들이 올 것 같다' 고 토니가 말했던 점이 특히 신경 쓰였다. 새 식구라니? 타워에 누가 또 온다는 뜻인가? 설마 캡틴은 아니겠지.
"도착 예정 시간은?"
"20분 남았어. 이제 그만 엉덩이 붙이고 내릴 준비 하던지, 아니면 꼴사납게 구르던가!"
"타워 위에 세워. 알아서 내려갈 테니까!"
뭐라고 궁시렁거리며 욕을 주워섬기는 로켓에게 퀼은 활짝 웃어보였다. 저렇게 좋을까. 지구에 애인이 생겼다면서 우주보다 지구에 눌러앉아있는 시간이 더 많아진 퀼은 바람둥이 생활도 싹 청산해서, 동료들에게 놀라움과 경악을 선사했다. (설마 너 죽을때가 된 건 아니지? 가모라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게다가 상대는 무려 지구 최고의 셀렙- 그것도 남자라고 했다. 인간들 취향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로켓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퀼이 내려간 걸 확인하자마자 쌩 하니 우주선을 돌려 날아가 버렸다.
"토니! 토니! 나 왔어요! 토니!"
"억, 퀼.. 으윽. 숨막혀, 네 덩치로 그렇게 달려와서 껴안으면 어떡해?"
"보고싶었어요, 정말 죽는 줄 알았어... 빨리 뽀뽀, 아니 키스. 아니 침대부터-"
돌아오자마자 바디 어택을 선사하는 것도 모자라 다짜고짜 침대 운운하는 퀼의 옆구리를 토니가 세게 꼬집었다. 아야! 토니! 엄살이 반쯤 섞인 비명을 한 귀로 흘리며 토니는 엄격한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어제 말했잖아. 새 식구들이 들어오고 있단 말이지. 밤엔 몰라도, 지금은 절대로 안 돼."
"여긴 당신 전용층인데도요?"
"그건-"
"토니, 잠깐 이것 좀 봐 주겠나?"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려던 퀼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도저히 착각할 수 없는 목소리, 진중한 톤. 소리없는 발걸음. 설마. 기름칠 덜 된 기계마냥 끼기긱 소리를 내며 퀼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편안한 트레이닝복을 입은 스티브가 투명 패드를 들고 서 있었다. 그는 퀼과 눈이 마주치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뭔데? 줘 봐. ....흠. 여긴 전용 트레이닝 룸이야. 아까 말한대로 침실은 여기고."
"아, 어쩐지 평수가 조금 다른 느낌이더군. 알려줘서 고맙네."
"별것도 아닌데 뭘. 다들 이사 끝나면 홀로 모이라고 해. 저녁에 파티나 하자고."
"좋아. 그때쯤이면 정리도 마칠 수 있을 것 같고."
이게 무슨 상황이지? 퀼은 자신의 신체적 성능을 의심해 본 적이라곤 단 한번도 없지만, 지금만큼은 어디 한 군데가 이상해져있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사? 파티? 다들? 그리고 스티브 로저스? 퀼은 뭔가 말하고 싶은 사람처럼 입을 뻐끔거렸으나 토니는 나중에, 라고 속삭일 뿐이었다.
"이제부터 같이 살게 될 테니 다시 인사해야겠군. 잘 부탁하네."
그리고 스티브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왔다. 퀼은 직감적으로 그가 독점하고 있던 링 위에, 강력한 도전자가 발을 들이려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싸움은 안 하는게 좋다는 주의지만 거기에 사랑이 걸려 있다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고 만다. 퀼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씩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아주 세게.
"나야말로 잘 부탁해요, 캡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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