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춥군."


 토니는 차 뒷좌석에 앉으며 어깨를 조금 떨었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곧 눈이 내릴 것이라고 보도했던 어젯밤의 뉴스가 그제야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동시에 그닥 좋지 않은 일도 함께 떠오르는 바람에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나만 잘못한 것도 아니었지. 토니는 팔짱을 끼고 잔뜩 불편한 얼굴로 창 밖을 노려보았다. 가엾은 운전수는 오전에 태웠을 때보다 한층 기분이 나빠보이는 그의 얼굴을 백미러 너머로 몇 번 힐끔거리다 그만두고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게 내 잘못이야? 스케줄은 늘 자비스가 업데이트 하고 있잖아, 말하지 않더라도!"

 "나에게 2,3분 정도 시간을 낼 수도 있잖나. 왜 그렇게만 생각하지?"

 "누군 그러기 싫어서 이러는 줄 알아...! 연말이라고! 당신은 모르겠지만, 일년 중 제일 바쁜 시기!!"

 "바쁘다, 바쁘다.. 늘 같은 핑계만 대는 것도 지겹지 않나? 토니."

 "....이 꽉막힌 얼음덩이가 정말!!"



 어찌 보면 아주 사소한 말다툼이었다. 12월이 되자 토니는 파티에 참석하지 않는 대신 각종 이사회와 주주총회, 기술세미나, 실적보고 및 기타 굵직한 회사 내외부적인 일정에 의무적으로 얼굴을 보여야 했다. 비록 최고 경영자의 자리는 페퍼에게 일임한 상태였으나 전 최고경영자 및 회사의 톱 엔지니어로서 움직여 주지 않으면 이사들과 주주들이 불안해 한다는 게 그 이유 중 한 가지였다. 


 그보다 더 살인적인 스케줄에도 시달려 본 적이 있는 토니로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얼음에서 깨어난 후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방황하다 늦게나마 제 짝을 찾은 스티브에겐 연인과 함께 하는 연말을 거의 통째로 빼앗기는 게 서운했던 것이다. 토니라고 그렇지 않았겠느냐만, 최근 일주일이 넘도록 밤에 잘 때 빼곤 대화할 시간도 없는 상황이 싫었던 스티브는 평소의 침착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피로함을 뒤집어쓴 채 돌아온 토니를 몰아붙였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푸념과 비아냥을 듣던 토니도 결국엔 같이 폭발해서 아침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나온 상태였다.


 ".....나라고 바쁜 게 좋은 줄 알아? 멍청한 캡시클."


 운전수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던 토니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렸다. 문득 시선이 닿은 창 밖에는 도시의 빌딩과 사람들이 지나쳐 가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쉴드(한 번 크게 박살났지만 어쨌거나 명칭은 그대로이므로) 측하고 잠깐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저녁 전에는 돌아온다고 했었는데. 지금 가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 간만에 근사한 레스토랑에라도 가자고 할까. 아니면 오는 중일까. 


 어젯밤 그렇게 다투고도 결국 이런 꼴이다. 회의 중에도, 휴식 시간에도, 오찬 때도 토니의 머릿속엔 온통 스티브 생각 뿐이었다. 아침에 다녀오겠다는 말은 했어도 될 텐데. 모르는 척 하고 뺨에 뽀뽀나 하고 올걸 그랬지. 그랬다면 퉁명스러운 얼굴을 하고서도 받아주지 않았을까. 스티브는 내 생각 하고 있을까. 한 번 의식하고 났더니 생각은 점점 걷잡을 수 없어져서 토니의 관심사는 이제 '스티브에게 연락을 할까 말까' 로 바뀌어 있었다. 어떡하지. 


 "......아."


 바람이 차가워진다 했더니 하늘에서 가느다란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진눈깨비 정도로 조그맣던 눈은 조금씩 크키가 커졌고, 종내엔 함박눈이 소복하니 내리고 있었다. 토니는 갑자기 차에서 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추워진 날씨를 생각하면 겨울 코트임에도 쌀쌀할 터였으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눈을 맞으며 걷다 보면 이 작고 어지러운 생각의 미로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민은 짧고, 결단은 빨랐다.


 "내릴테니 세워요. 차는 주차장에 가져다 두고 오늘은 일찍 퇴근해요. 이건 보너스고."


 토니는 차 문을 열며 운전수에게 지폐를 내밀었다. 눈도 오는데 가족들하고 저녁이나 먹으라는 소립니다. 갑작스러운 일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어쩔 줄을 모르던 운전수는 토니의 덧붙인 말을 듣자 그제야 활짝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문이 닫히고 차가 멀어지는 걸 보며 토니는 천천히 타워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알아볼 것 같아서 일부러 목도리(스티브가 짜 준 것이다. 콜슨이 알면 기절할듯이 놀라고 다음엔 갖고싶어서 눈이 번뜩이겠지)로 코와 입 부분을 칭칭 감았다. 단정한 정장과 코트에는 좀 눈에 띄는 와인색의 목도리였지만 무척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토니는 결국 메시지를 전송했다.


[뭐 해? 스티브.]

[나 지금 스타크 타워 근처에서 걸어가는 중이야.]

[함박눈이 오는데, 정말 경치가 끝내줘.]

[보고 싶어.]


 보내고 난 뒤에야 좀 더 다정하게 쓸 걸, 차라리 전화를 해서 식사하러 가자고 할까, 지금이라도.... 이미 늦은 후회를 하며 핸드폰을 뒤적거리던 토니에게 삐릭 하는 메시지 수신음이 들려왔다.


[토니, 어디쯤 오나?]

[이제 거의 타워에 도착할 것 같군. 버스에서 막 내렸어.]

[눈 오는 거리의 풍경이 멋져 보이는건 오랜만이야.]

[보고 싶어.]


 그저 문자의 나열일 뿐인데도, 자신과 거의 동시에 보낸 듯한 스티브의 메시지를 읽은 토니는 뭔가 뜨거운 감정이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당신도 내가 보고 싶었구나. 연인 사이가 됐으면서도, 평생 살아온 환경이 너무 달라서 그것 때문에 종종 다투지만 서로에 대한 마음만큼은... 


 그렇게 깨닫자마자 갑자기 스티브의 얼굴이 무척 보고싶었다. 토니는 비싼 구두가 눈에 더럽혀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타워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거의 다 왔다고 했으니 금방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버스 정류장이 이 근처 어디에 있더라? 지금 타워까지 남은 거리는 얼마나 되지? 내 속도로 봤을 때 걸리는 시간은 어느 정도지? 천재의 뇌는 이럴 때조차 쿼드코어적인 사고로 온갖 복잡한 것들에 대해 떠올리고 전개시켜나가고 있었지만, 지금 토니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저 스티브를 만나는 것이었다. 


 "....토니? 토니!"

 "...! 스티브...."


 반가움에 크게 이름을 불렀다가 즉시 사람들을 의식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스티브의 모습이 귀여웠던 나머지 토니는 숨이 턱에 차서 힘들었던 것도 잊어버리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것을 확인한 스티브가 성큼성큼 걸어와 토니의 앞에 섰다. 


 "목도리... 했군."

 "당신이 만들어 준 거잖아. ....따뜻하더라고."

 "촌스럽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잘 어울려서 다행이네."

 "난 토니 스타크니까."


 둘은 어색한 듯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보고 싶어서 달려왔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어젯밤의 말다툼이 떠올라 버렸고, 혹시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건 아닐까 눈치를 보며 망설이고 있었다. 


 "그, 토니.."  

 "저기, 스티브.."

 "먼저 말하게."

 "아니, 당신이 먼저..."


 또 다시 침묵. 이러다간 날이 새도록 눈을 맞으며 서 있을 것만 같은 예감에 토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스티브. 내가 당신에게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하지만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스티브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토니. 나야말로.. 자네 생각을 못 했어. 나랑 같이 있고 싶었을텐데, 그만 서운함이 튀어나와서.. 미안하네."


 "....하루 종일 보고 싶었네.. 토니."

 "..나도, 당신이 보고 싶었어... 스티브."


 둘은 그제야 시선을 맞추었다. 스티브도 토니도 입가에 쑥스러운 미소를 띄운 채,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스레 거리가 좁혀지고, 든든한 팔이 서로를 감싸안았다. 그것만으로도 추위는 이미 느껴지지 않았고, 내리는 눈 사이로 지난 밤의 잘못들도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스티브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토니는 살짝 발돋움을 했다. 추위에 약간 거칠해진 두 입술이 맞닿았다. 짧은 키스였지만 두 연인의 마음을 채우기엔 충분한 접촉이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레스토랑을 예약해 뒀는데... 갈래?"

 "그럼 난 자네가 좋아하는 와인을 고르지."

 

스티브는 토니의 목도리를 조금 더 보기 좋게 둘러 준 다음 차가워진 손을 잡았다. 장갑을 끼지 않았지만 스티브의 손은 제법 따뜻하게 토니의 손을 감싸왔고, 직접 전해지는 체온에 토니는 온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둘은 나란히 눈 내리는 거리를 걸어갔다. 크기가 다른 발자국들 위로 다시 소복히 흰 눈이 쌓였다. Let it snow, let it snow, let it s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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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일이 또 커진 거지.. 아침에 트위터에서 '갓 데운 스팀밀크에 진한 다크 초콜릿을 녹여서 만든 핫초콜릿처럼

달콤 쌉싸름한 스토니가 보고 싶다' 고 외쳤을 뿐인데 제가 그걸 연성하고 있다니..... 의사양반! (멱살

이게 다 눈 때문입니다. 사람 마음 괜히 설레게 하고 말이야. 으흑크흐흑. 아침부터 지금까지 루팡하며 근근히 쓰느라

제법 오래 걸렸네요.... 두 사람은 연애나 잔뜩 했음 좋겠습니다. 연말에 데이트도 하고 침대에서 나오지 않기도 하고.

스토니는 정말 최고에요!!!!!!

by 치우타 2014. 12. 3. 1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