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눈에 보기에도 상당한 경력을 쌓은 것처럼 보이는 나이든 간호사가 어디론가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지금의 자리에 올라와 있는 그녀였지만, 얼굴에는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일까. 좀처럼 간호사를 호출하지 않는(수술이나 기타 업무 이외에는) 의사에게서 이렇게 '퇴근 전에' 호출을 받는 것을 이례적인 일임은 틀림없었다. 
- 하물며 그 의사가, 신경외과의 에릭 렌셔일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수간호사는 드디어 그의 진찰실 앞에 도착했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리자, 들어와. 라는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호출하셨죠? 무슨 일로...."
"이 차트들 전부 정리 끝났으니 가져가도록. 그리고."


겨우 차트를 가져가라고 나를 불렀다고? 그녀의 자존심이 상처를 받으려는 찰나 에릭이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을텐데. 공적인 우편물 이외에는 보고싶지 않아."


에릭은 차트더미와 함께 줄로 묶은 한 다발의 편지뭉치를 건네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색색의 편지봉투들은 안 봐도 그 내용이 뻔한 것들이겠지. 수간호사는 속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절하게 구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야. 다음부터는 전부 휴지통이나 소각로행이니 그리 알라고 해."


나가봐. 대답은 필요없다는 듯 에릭은 고개를 돌려 책상 위의 파일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서류를 뒤적이던 그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구겨진 얼굴로 앉아있던 에릭은 의자에서 팩 일어났다. 평소에도 이런 편지나 은근한 신호들에 시달려 오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짜증이 밀려왔다.

길어야 3일, 늘 인스턴트적인 관계만을 유지하던 그에게 여자들의 관심과 유혹은 귀찮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도, 아예 그런 생각도 안 하는 그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일방적인 이별(?)을 감당 못하고 집요하게 그의 뒤를 따라다니던 여자들도 에릭이 '정말로' 연애세포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눈물을 훔치며 혹은 욕설을 하며 떨어져 나갔다. 어쨌든 에릭은 이런 기분으로 집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요만큼도 들지 않았고, 오늘은 누구라도 괜찮은 상대를 하나 낚아서 질펀하게 섹스나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옷을 갈아입고 사무실을 나섰다. 


늘 가던 단골바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상대를 물색하고 싶었기에 즉석공연과 술이 맛있기로 유명한 Bar Cerebro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침 사람들이 누군가를 무대에 올리려고 하는 참이었는지 시끌벅적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술은 조용한 곳에서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에릭이었지만, 그냥 신경쓰지 않기로 하며 바에 걸터앉았다.


"마티니. 드라이로."
"알겠습니다."


처음에 그는 즉석공연에는 요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간혹 프로 뺨치는 사람들이 부르기도 한다던가,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 프로가 불렀다던가 하는 소문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바텐더가 만드는 마티니, 특히 드라이 마티니는 에릭의 까다로운 입맛에도 훌륭하다고 느껴질 만큼 맛이 있었고, 여기에서 만났던 원나잇 상대들은 보통 중상급 이상들이었기에 여기를 택한 것 뿐이었다. 하지만 곧 에릭은 마이크를 통해 들려온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Des yeux qui font baisser les miens
시선을 떨구게 하는 눈
Un rire qui se perd sur sa bouche
이내 입가에서 사라지던 웃음
Voila le portrait sans retouche
내가 몸을 바쳐 사랑하는
de l'homme au quel j'appartiens.
한 남자의 고치지 않은 초상화가 있었지요.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스탠딩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남자는 약간 아담한 체구였지만 딱 떨어지는 블랙 정장과 오픈형 셔츠가 아주 잘 어울렸다. 어디에서 들어본 곡인데. 에릭은 곰곰이 생각하며 바텐더가 내어놓은 드라이 마티니를 손에 들었다.

Quand il me prend dans ses bras
그가 두 팔로 나를 껴안을 때
il me parle tout bas
나에게 나직히 속삭일 때
Je vois la vie en rose
나는 장미빛 인생을 보았어요

남자는 다음 부분을 부르며 감았던 눈을 뜨고 살풋 미소지었고, 에릭은 순간 못 박힌 것처럼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되었다. 눈꺼풀 속에 가려져 있던 푸른 눈동자와, 잘 익은 체리를 연상시킬 정도로 붉은 입술은 강렬한 색채의 대비임과 동시에 남자의 인상을 확실하게 결정짓는 요소였다. 거기에 듣기 좋은 목소리로 부르는 나른한 La vie en rose 라니. 에릭은 좋아하는 마티니를 마시는 것도 잊어버린 채로 남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에릭의 그런 강렬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남자 또한 노래의 마지막 부분을 부를 때는 에릭을 바라보며 은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노래가 끝나자 엄청난 환호와 박수가 바를 가득 채웠고, 남자는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거기에 답하고는 천천히 에릭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그제서야 자각한 에릭은 시선을 돌리려고 했지만 몸이 굳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남자는 이윽고 에릭의 앞에 도착했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미스터."


에릭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보면 무례하게 생각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남자는 오히려 그 허락의 몸짓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눈을 휘며 부드럽게 웃고 브랜디를 주문했다. 


"노래, 좋아하시나요?"


뜬금없는 질문에 에릭은 옆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저를 내내 뚫어져라 쳐다보고 계시길래."
"....몇 번, 들어봤습니다."
"좋아하지는 않구요?"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자, 남자가 브랜디를 훌쩍 마시더니 에릭에게 바싹 다가서서 속삭였다.


"그럼 내가 마음에 든 거군요."


의문형이 아닌, 자신에 찬 말투를 들으며 에릭은 다가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본 두 눈동자는 더욱 푸르렀고, 셔츠 사이로 보이는 흰 목덜미는 마음 속의 어떤 것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에릭은 남자의 목을 물어뜯어서 표식을 남기고 싶다는 난폭한 충동에 휩싸였고, 덕분에 몸에 열이 확 오르는 게 느껴졌다. 미련 없이 남은 마티니를 털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지."


남자는 에릭의 말을 듣더니 피식 웃었다.


"좋아요."
by 치우타 2011. 11. 6.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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