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의 차에 올라탄 두 사람은, 아니 정확히 에릭은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걸어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전에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말했다.  "어디로 가지?" 찰스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데이트의 주도권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거에요, 에릭."  "...좋아."  별로 생각해둔 곳은 없었지만 인스턴트적인 관계를 가지던 이들과 가던 장소들 중 몇 군데는 아직 기억에 남아 있었다. 에릭은 운전을 하면서 조수석에 앉은 찰스를 조금씩 힐끔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밤에 봤을 때와 밝은 낮에 보는 것은 전혀 느낌이 달랐다. 옷차림도 그렇지만 눈빛이나 말투가 확연히 차이가 나고 있었다. 바에서 만났을 당시에는 좀 더 유혹적이면서도 대담하고, 상대를 끌어당기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차분하면서도 쾌활하고, 예의바른 분위기였다. 잘 배우고 자란 도련님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무슨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 같군. 낮에는 젠틀, 밤엔 섹시라니.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피식 웃고 있는 동안, 그걸 보던 찰스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좀 실례해도 되죠?"
".....밑도끝도없이 무슨 소리야."
"셔츠가 답답해서요."


에릭은 그제서야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 찰스의 드레스 셔츠를 힐끗 바라보았다. 전에는 오픈형이었지. 그와 동시에 희고 유려한 선을 가진 목덜미가 떠올라 에릭은 재빨리 그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좋을대로."


에릭의 허락(?) 이 떨어지자 찰스는 반색을 하더니 단추를 하나만 풀러내리고 큰 숨을 탁 토해냈다. "아, 이제야 살겠네..." 그 말을 듣고 에릭은 다시 찰스를 바라보았다. 겨우 그 정도로 저렇게 해방된 표정이라니. 답답한 걸 싫어하는 건가. 그러면 왜 저렇게 입고 온 거지? 갑자기 물음이 고개를 들었다.


"굳이 그렇게 입고 올 필요가 있었나?"
"클라이언트와의 만남이니까요. 카페 자체 성격도 있고. 거기다...."


말끝을 흐리는 찰스를 보고 에릭은 한 쪽 눈썹을 위로 쓱 치켜올렸다. 뭔가 켕기는 듯한 말투였다. "거기다?" 답을 재촉하기 위해서 일부러 목소리를 한 톤 낮추며 되묻자, 돌아온 것은 의외의 말이었다.


"이런 걸 백주대낮에 자랑하고 다닐 순 없잖아요?"


마침 신호는 빨간불이었고 에릭은 '이런 게' 뭔가 싶어서 찰스를 쳐다봤다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 했다. 흰 목줄기를 중심으로 쇄골 근처까지, 몇 개의 붉은 울혈들이 자신의 존재를 과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희미하지만 이빨 자국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에릭은 순간 어이가 없고 황당한 가운데서, 이유모를 분노가 쾅쾅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연 그를 찰스가 먼저 가로챘다.


"오해할까봐 말해두는데 이거 범인 당신이에요."


에릭이 얼빠진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찰스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가 섹스한 건 수요일 밤이었어요. 덧붙여서 에릭, 진짜 집요하게 물어뜯었던 거 알죠? 난 상어한테 먹히는 줄 알았다니까요. 세상에."  ..... 그러고 보니 흰 피부에 남는 자국이 마음에 들어서 집착하듯 두 번씩 깨물고 핥았던 게 기억났다. 에릭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고, 찰스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 알았어요?"
".......음."


결국 찰스의 셔츠는 그 상태로 놔두는 데에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고, 점심 식사를 위해 도착한 곳은 전형적인 아메리칸 키친이었다. 뷔페식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자유로운 식사 분위기였지만 사람의 습관이란 쉽게 떨쳐낼 수 없는 것이기에 찰스는 에릭의 테이블 매너를 꼼꼼하게 체크했다. 우아하게 의자에 앉은 자세부터, 손놀림, 식사 예절, 상대방에 대한 매너까지 나무랄 데 없이 완벽했다. 교육받은 자제의 느낌이라고 하기엔 약간 딱딱했지만 오히려 그것때문에 절제된 동작이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신경외과는 뭐 하는 데에요?"
"사람의 신경계를 다루지."
"어려울 것 같은데...."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야. 장단점이 있어."


에릭은 그닥 말이 없는 타입이었지만 이야기를 들어야 그에 대해서 더 파악하기가 쉽기 때문에 찰스는 종종 질문을 던지거나 화제를 꺼내 대화를 이끌어냈다. 에릭은 찰스가 툭 던져오는 질문이나 화제에 그럭저럭 잘 응해주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침묵이 찾아오면, 둘 다 별다른 생각 없이 그 시간을 즐기기도 했다. 신기하군. 에릭은 지금까지 데이트(라고 할 수 있다면)를 하며 대화가 단절되는 순간이 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안 그래도 무기질적인 관계에 어색함까지 더해져서 참기가 힘들었는데, 찰스와는 오래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무척이나 편안했다. 오래된 연인이라는 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군, 하고 잠깐 생각하던 에릭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 문장을 마음 속 저 밑으로 재빨리 구겨넣었다.

식사 후에는 찰스의 제안으로 백화점에 들렀다. 에릭이 평소 어떤 스타일을 입는지 궁금하다면서 그의 손을 거의 잡아끌던 찰스는 그에게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보라고 옷들을 향해 손을 쓱 펼쳐보였다. 에릭은 별 희안한 걸 다 시킨다며 황당해 했지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옷을 골랐다. 눈을 반짝이며 그걸 지켜보던 찰스는 점점 표정이 굳어지더니 결국에는 경악한 얼굴을 하고 에릭을 바라보았다.


"...what?"
"그거, 진심이에요?"
"골라보라며."


찰스는 마음 깊은 곳에서 끄집어 낸 듯한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는 옷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영화관으로 가는 차 안에서 찰스는 내내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건 정말 강수가 필요하겠어. 어림짐작이 맞아떨어졌고, 80%정도 확신이 섰으니 남은 건 직접 가서 확인하는 일만 남았군. 마침 주말이고 하니까 기회도 좋고. 한편 에릭은 그렇게 찰스의 생각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 표정을 보며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뭐야, 신경쓰이잖아. 그리고 그때 찰스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에릭. 내일 약속 있어요?"


에릭은 머릿속에서 자신의 스케줄 수첩을 좌라락 펼치며 확인해보고 대답했다.


"아니, 없어."
"그럼 오늘 나 좀 재워줘요."


찰스의 폭탄발언에 에릭은 액셀 대신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 했지만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고 그 상황을 속도를 줄이는 것으로 해서 부드럽게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입을 통해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동요가 실려 있었다.


"....왜."
"컨설팅의 일환이에요. 당신 평일엔 바쁘잖아요? 나도 들쑥날쑥하거든요. 제일 중요한 것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
"그게 뭔데?"
"내일 아침에 말해줄게요."


그래서 yes or no?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찰스를 보며 에릭은 아주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대체 뭘 하자는 건지도 궁금했지만, 재워달라는 뉘앙스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걸 어떡할지 고민하는 것 보다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좋아. 재워주지."
"oh, how nice of you, Erik."


긍정의 대답에 찰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동작으로 감사를 표했고, 에릭은 전혀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며 마주 씩 웃어보였다. 천만에. 오히려 그 말은 내가 해야될 것 같은데, 찰스. 말이 되지 못한 생각의 꼬리표는 한 바퀴 그의 머리를 돌고 자취를 감추었다.


by 치우타 2011. 11. 21.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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