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은 어딘가 팔 안이 허전한 감각에 문득 눈을 떴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옆자리를 더듬자, 돌아온 것은 서늘한 침대 시트의 촉감 뿐이었다. 샤워라도 하러 간 건가 싶어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지만 물소리는 커녕 누군가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없이 밀려드는 실망감과 아쉬움에 몇 시인가 살펴보기 위해 침대 옆 테이블로 시선을 던진 에릭은 작은 메모를 발견했다.

'늦잠꾸러기 상어씨에게. 환상적인 밤 고마웠어요. 반은 내가 지불했으니 신경쓰지 말아요. Adieu'

반듯한 글씨체는 남자와 많이 닮아있었다. 에릭은 잠시동안 상어라는 단어에서 고개를 갸웃했지만 비유적인 표현인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다른 것이 그의 관심을 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이 아니라 이름을 가르쳐 준 것부터 시작해서 원나잇 상대는 보통 여자가 대부분이었는데 어제는 남자였고, 거기다 자신이 먼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다. 호텔비는 자신이 카드로 지불해왔는데 더치페이를 하게 된 것, 아침에도 먼저 자리를 뜨는 건 언제나 에릭의 몫이었지만 선수를 뺴앗긴 것, 마지막으로 그렇게 죽여주는 섹스를 한 상대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꿈이라도 꾼 기분이군."


아무도 없는 허공에 중얼거린 말은 공기중으로 금세 흩어졌다.

에릭은 그대로 복잡한 머리를 안고 병원에 출근했다. 언제나와 같이 회진을 하고, 차트를 체크하고, 수술 스케줄에 변경된 것은 없는지를 살펴보고 나자 어느새 점심시간이 돌아와 있었다. 오늘도 메뉴 고민부터 시작해야겠군.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어젯밤의 기억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사무실의 문을 열자 책상에서 요란하게 진동이 울려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에릭은 핸드폰을 주워들어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오늘 수술 일정 별로 없던거 아니야?]"
"의사의 스케줄을 만만하게 보는군. 무슨일인데."
"[...오빠. 요즘 만나는 사람은 있어?]"


또 시작이다. 에릭은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들, 그 중에서도 특히 자신의 일에 관심이 많고 간섭도 그만큼 하려고 드는 여동생의 존재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괴로운 것은 사실이었다.


"레이븐. 그 이야기라면 됐어."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내년이면 오빠 나이가 몇이게? 애인 한명 정도는 있어야 맞잖아.]"
"나이가 숫자의 개념으로 바뀐 지 오래전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걱정이 되서 그래. 연애 좀 해, 오빠. 제발. 제대로 된 걸로.]"
"때가 되면 하겠지. 더 할 말 없으면 끊는다."
"[아 잠깐! 용건은 끝까지 들어야지! 행크 아는사람 통해서 컨설턴트랑 계약 끝냈으니까 그렇게 알아.]"
"....뭐?"
"[이번주 주말에 약속 잡아뒀고 번호랑 다 문자로 갈거야.]"
"그런 거 필요없어. 왜 멋대로 일을 진행하는거야."
"[벌써 계약금도 다 지불했고 끝난 이야기니까 알아서 해, 오빠. 그럼 끊을게.]"


대답은 들을 거 없다는 듯이 전화는 그렇게 끊어졌고, 에릭은 덕분에 한동안 멍한 얼굴로 뚜- 뚜- 하는 통화 종료음을 듣고 있었다. 점심 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밥이 넘어갈만한 기분은 아니었다. 에릭은 전화를 던지듯이 책상 위에 올려두고 이번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감싸쥐었다. 이 나이 먹도록 부모님도 아니고 여동생의 연애 간섭이라니. 보나마나 이건 레이븐의 독단임에 틀림없었다. 부모님은 에릭이 의사가 되어 병원에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된 다음부터는 터치하는 걸 그만두었고, 엠마 또한 니 인생은 니가 알아서 하라는 태도를 취했다. 대체 레이븐만 왜 이런 걸까. 형제들 중 제일 먼저 결혼해서 그런건지 천성인지.. 그때 마침 핸드폰에서는 문자의 도착을 알리는 진동이 울렸고 거기엔 컨설턴트의 이름과 전화번호, 만날 장소, 시간 등이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Charles F. Xavier] 모로 보아도 남자의 이름이다. 거기에 미들네임이라니, 어디 귀족 자제라도 되시는 모양이지. 에릭은 괜히 만나지도 않은 컨설턴트를 비아냥거리며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주말이 찾아왔고, 에릭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어쩔 수 없이 약속 장소인 카페로 향했다. 막 점심이 되려는 시간대의 카페는 본래 붐비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소위 상류층들이 자주 온다는, 예약 없이 들어오기란 힘든 그런 고급형 카페였기 때문에 대체로 조용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창가 자리를 안내받아 자리에 앉은 에릭은 밖의 풍경에 잠시 시선을 던지다가, 건너편에 자연스럽게 앉는 남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안녕하세요. 또 만났군요."
"여긴 어떻게..."
"약속이 있어서요."
"...나도 마찬가지야."


얼마 전에 뜨거운 밤을 함께 보낸 그 남자였다. 그날 밤과는 다르게 빈틈없이 잠긴 드레스 셔츠와 깔끔하고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짙은 푸른색의 정장을 입은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기에 에릭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거 대단한 우연이네요. 어떤 약속인가요?"
"네가 알 거 없어."


차갑게 뚝 끊어서 말하고서도 에릭은 스스로에게 잠시 놀랐다. 보통 안면이 없는 사이에도 이런 식으로 후려치듯이 말을 던진 적은 없었는데, 이상하게 남자의 얼굴을 보자 아침에 혼자 일어나 차가운 옆자리를 봤을 때의 당혹감과 묘한 실망감이 가슴을 뒤흔들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말을 뱉은 후였다. 그렇지만 남자는 오히려 장난스러운 눈빛을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너무 쌀쌀맞네요. 앞으로 계속 볼 얼굴인데, 좀 친하게 지내는 건 어떻습니까? 에릭 렌셔 씨."


이번에는 정말 깜짝 놀라서 에릭은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연애 컨설턴트,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라고 합니다. 잘 부탁해요, 에릭."
 

by 치우타 2011. 11. 1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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