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은 길었던 수술을 끝내고 사무실에 들어왔다가 책상 위에 놓인 우편물을 발견했다. 잊어버릴만 하면 생각나게 만드는 그 특징적인 문양에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신경 외과의 협회. 답지 않은 한숨을 짧게 내쉬고 열어본 내용에는, 이번 주말에 자선을 위한 파티 겸 간단한 경매가 진행될 예정이니 참석해 달라고 적혀 있었다. 보나마나 아주 따분한 모임이 되겠군. 미련 없이 초대장을 접으려던 에릭의 눈에 특별히 굵고 진한 글씨체로 쓰인 문장이 들어왔다.

파트너를 꼭 데리고 올 것. Dress code : Black 


이번엔 새로운 룰도 추가된 모양이었다. 그러고보니 다음달이 벌써 크리스마스였다. 시간이 참 빨리도 간다고 생각하며 에릭은 파트너로 찰스를 데려가야 겠다고 결정하고 있었다. 드레스 코드는 무척 심플했고, 어차피 자선 파티라는 이름만 번지르르하게 걸어놓고 서로 잘난 척이나 하는 시간이 될 것이 뻔했다. 의사들이란 대부분, 환자들이 경이와 존경을 담아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남들보다 뛰어난 자신의 위치를 뽐내고 거만하게 굴며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 그 엄청난 권력에 홀려 때로는 주객전도적인 행동을 취하기도 하는 지극히 한심하고 치졸한, 평범한 인간들이었다(물론 에릭 자신은 그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물론 훌륭한 의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대부분 권력 다툼에는 관심이 없어 높은 곳에 올라가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 이 초대장을 보내온 에릭의 은사는 인품과 권위, 양쪽을 다 가진 특이 케이스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러 생각들을 흘려 보내며 에릭은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주말에 바빠?]


짤막하지만 필요한 요건은 다 들어있는 문장이 전송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리나케 답장이 돌아왔다.


[널 만나느라 바쁘지, 달링.]


하여튼 잘도 이런 소리를 시도때도없이 하는군. 이제는 그 스타일에 완전히 익숙해졌는지 에릭은 가볍게 코웃음치며 조금 느릿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금요일 저녁에 와. 여벌 수트 가지고.]
[여벌은 왜?]
[자선파티. 토요일에.]
[드레스 코드는?]


과연 컨설턴트. 자선파티라는 단어만 보고서도 가장 필요한 사항을 물어보다니. 에릭은 새삼 찰스의 직업정신에 감탄하며 답을 보냈다.


[Black.]
[Got it. See u in friday night, h.s]


오늘도 여전히 같은 호칭으로 문자를 끝맺는군. 사실 처음에 찰스가 h.s 라고 보냈을 때에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서 반나절 정도는 그에 대한 고민을 한 적도 있었다. 바로 물어봤더라면 그럴 것도 없이 알 수 있었겠지만 공교롭게도 회진과 수술이 연달아 잡혀 있었기 때문에 에릭은 h.s 가 어떤 단어의 줄임말인가 혹은 어떤 암호같은 것인가에 대해 틈틈이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결국 퇴근시간까지 아무것도 생각해낼 수 없었던 그는 참지 못하고 찰스에게 전화해서 다이렉트로 물어보았고, 부드러운 어투로 전화를 받아 인사를 건네던 목소리가 유쾌한 웃음소리로 변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에릭, 그건 handsome shark의 줄임말이야. 섹시한 마이 허니를 위한 특별한 호칭이지.'
'.....상어가 섹시해?'


처음 만났을 때도 쪽지에 그런 말을 썼던 걸 기억해낸 에릭이 의아함을 가득 담아 물음을 던지자 찰스는 다시 즐거운 듯 웃더니 짐짓 진지하게 목소리를 내리깔며 속삭여왔다.


'오, 물론. 그 유려한 자태는 생물학자들도 추앙해 마지않는 바인걸. 바다생물 중 섹시킹일거야.'
'기준을 알 수가 없군.'
'괜찮아. 원래 미학이란 이해받기 어려운 거니까.'
'퍽이나.'


통화는 결국 찰스가 에릭을 만나러 오기 전까지 계속되었고, 몇 가지 단계를 거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을 보자마자 덥석 붙잡아 목덜미를 콱 깨물어 흰 피부에 훌륭한 잇자국을 선사하는 것으로 에릭은 자신을 꽤나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든 원흉에게 약간의 심술어린 복수를 돌려주었다(후에 찰스에게서 정말 먹히는 줄 알았다는 불평을 들어야 했지만).


금요일 저녁, 찰스는 바디라인이 잘 드러나는 연미복풍의 고급스럽고 심플한 블랙 수트를 가지고 왔다. 에릭은 지금 당장이라도 입어보라는 말을 할 뻔했지만 간신히 목 깊은 곳으로 삼켰고, 그런 의중을 읽기라도 했는지 찰스가 즐거움은 남겨둬야지, 달링. 하고 뺨에 쪽 뽀뽀해왔다. 혹시 생각을 읽는 초능력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에릭이 건네자 개구진 웃음이 보상으로 돌아왔다. 오 에릭, 그럴리가 없잖아. 의사선생님 치고는 비과학적인 생각을 하는군. 다시 입술이 닿아왔고 이번엔 고개를 돌려 깊게 혀를 얽었다. 뜨거운 숨이 뒤엉키고 이내 찰스의 손에서 양복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키스 사이로 구겨져.. 하는 작은 속삭임이 흘러나왔고 모양 좋은 손이 아래로 내려와 몇 번 바닥을 더듬더니 옷걸이를 잡아채 그대로 의자에 솜씨 좋게 걸어두었다.


"이제 됐지?"
"맙소사. 내 달링은 뒤에도 눈이 달린거야? 이건 또 새로운 발견인데..."
"그만. 입 좀 다물어봐."


넌 가끔 말이 너무 많아. 부끄럼 타는 소녀도 아니면서.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가 잠시 크게 흔들렸지만 에릭은 눈치채지 못했다. 영화 보면서 눈물 흘리는 남자가 할 말은 아니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놀리듯 던져온 말에 항의하려고 입을 열자 냉큼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덮쳐왔다.


"항의할 시간에 키스나 더 하지? 잘생긴 상어씨."
"...내일 아침에 후회하지나 마."
"워우 무서운걸. 살살해줘, 자기."
"상어가 왜 포식자인지 보여줄테니 기대해."


말이 끝나자마자 둘은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급하게 입술을 맞대며 침실을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by 치우타 2011. 12. 29.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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