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의 꿀잠을 깨운 것은 일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였다. 예전 고객이자 이제 절친한 친구가 된 행크 맥코이였다(그의 연애와 결혼은 전적으로 찰스의 덕분이었다). 그의 아내인 레이븐의 부탁으로 의뢰를 해야 할 것 같다면서, 잘 부탁한다는 인사와 함께 받은 클라이언트의 이름은 바로 어젯밤에 뜨거운 섹스를 나눈 바로 그 '에릭 렌셔' 였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찰스는 사적으로 감탄한 다음 일 모드의 스위치를 켜고 보내온 정보를 확인했다. 에릭 렌셔, 직업은 신경외과 전문의. 어쩐지 느끼는 곳만 골라서 사람을 괴롭히더니만... 3일 이상 지속된 관계 없음. 3일? 애매한 기간인걸. 저도 모르게 눈썹이 찡긋 올라간다. 그야 물론 하루만에 끝장나는 커플을 본 적도 있기는 했었다. 그렇지만 아예 하루면 모를까 애매하게 3일이라니. 이건 개인 성격문제 같은데. 찰스는 종이를 펄럭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관심이 없는걸까. 아니면 그냥 단순히 연애 회의주의자일까. 일단 에릭을 직접 만나서 확인해야 할 사항들이 꽤 많을 거라고 생각하며 찰스는 종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섹스는 끝내줬고, 그렇게 잘 생긴 얼굴에, 듣기 좋은 목소리에 잘 나가는 직업을 가진 남자가 인스턴드적 관계만 해왔다니. 아깝기 그지없는 일이잖아. 설마 패션센스 때문은 아니겠지? 평소 옷차림도 체크해봐야겠어. 

약속은 바로 이번 주 주말이었다. 아마 날 보면 눈 튀어나게 놀라지 않을까. 찰스는 괜히 피식 웃으며 달력에 동그라미를 쳤다. 

대망의 토요일 아침, 찰스는 샤워를 깔끔하게 마친 다음 가운을 걸치고 나와 옷장 앞에서 고민에 빠졌다. 평소에 앞이 트인 오픈형 칼라의 셔츠를 즐겨 입는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러기가 무척 난감했다. 아닌게 아니라 에릭, 그 상어같은 남자가 물어뜯은 자국이 아직도 목과 쇄골에 보란 듯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틀이나 삼일이면 가라앉아서 잘 안 보이기 마련인데, 이건 무슨 이빨 자국도 아직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단 둘이 만나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약속 장소는 조용한 고급 주택가의 카페였던 관계로 옷차림에 더 신경을 써야만 했다. 답답하지만 할 수 없지. 찰스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우아한 디자인의 드레스 셔츠를 꺼내들었다.

카페에는 에릭이 먼저 와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올 정도의 존재감을 가진 그는 오늘도 그 나이먹은 중년풍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조만간 집을 습격해서 스타일 체크를 처음부터 해야될 것 같은데? 찰스는 그렇게 마음먹으며 쾌활하게 인사를 건넸고, 에릭은 청회색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가늘게 좁혔다. 내 옷차림을 보고 있는 모양이군. 행동심리학을 전공했던 찰스에게는 다 눈에 보이는 행동이었다. 


"연애 컨설턴트라고?"
"아마도요."
"아마도?"
"정확히는 라이프 컨설턴트라고 하죠. 난 고객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조금 도움을 주는 것 뿐이에요."
"예를 들면?"


범인을 심문하는 형사를 닮은 말투에 찰스는 자기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에릭의 눈썹이 냉큼 위로 치켜올라가는 것을 보고 일부러 더욱 쾌활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이런, 이거 신뢰도 테스트라던가 그런 건가요?"
"대충은."
"좋아요. 예를 들면, 섹스앤더시티의 주인공처럼 되고 싶다는 고객이 있었죠."
"뭐?"
"섹시하고 스타일리시한 뉴요커가 되게 해 달라는 뜻이에요."
".....아."


드라마 같은 걸 볼 리 없는 에릭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자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남자들은 드라마를 챙겨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는 하다. 그래도 섹스앤더시티는 엄청 팔린 드라마라서 이름 정도는 알 텐데. 아무래도 의대 다니면서 공부만 한 모양이군. 찰스의 머릿속에서 에릭의 정보가 또 하나 갱신되었다.


"그래서 스타일을 찾아주고, 그녀 자신이 모르던 장점들을 발견하도록 도와줬죠."
"어떤 식으로?"
"그 이상은 비밀. 클라이언트의 프라이버시라서요."
".....흠."

손가락으로 살짝 입술을 누르며 찰스가 윙크를 해 보이자, 에릭은 묘하게 납득이 가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덥잖은 대화가 끝나고, 둘의 찻잔이 다 비워질 무렵 찰스는 컨설팅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에릭."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해."


던지듯이 말해오는 에릭의 말투에는 여전히 별로 관심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그의 성격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찰스는 머릿속으로 컨설팅 지도의 콘티를 한번 더 점검해 보았다. 컨설팅의 기본은 상대에 대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파악한 다음부터 시작된다. 두 번째 만남이지만 에릭의 패션센스는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깝다는 결론을 내린 것처럼, 가까이에서 습관, 매너, 버릇, 말투 등등을 체크할 거고 대화 주제나 기본상식, 억양, 시선도 제대로 봐야만 했다. 좋았어. 모험을 시작하는 소년과도 같은 표정이 찰스의 얼굴에 떠올랐다.


"우선 오늘 하루동안 저랑 데이트하는 것부터 시작하죠."


찰스의 입에서 나온 그 한 마디는 '오늘 날이 참 좋군요 놀러가고 싶은 날씨네요' 처럼 아주 평이하면서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에릭은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멍청하게 되물었다. (정말로, '멍청한' 어조로!) 


"......뭐라고?"
"이제부터 데이트 타임이라구요."
"누구랑?"
"Of course, me."


정말로 즐거운 듯 활짝 웃는 찰스를 보고 에릭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끝내줬던 원나잇 상대가 컨설턴트, 그것도 연애에 대해 가르치겠다며 눈 앞에 앉아있는 것도 그렇지만, 대체 이 남자는 뭘 믿고 이렇게 자신감에 넘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헌데 이상한 건 그게 싫지가 않다는 거였다. 선을 넘을 기세로 성큼성큼 걸어와서 황급히 제지하러 달려와보니 선 바로 앞에 서서 예의를 차리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섹스하던 순간에는 완전히 주도권이 나한테 있었는데. 에릭은 괜히 심술이 났다.


"이유를 들어볼까."
"음, 그야 당신을 컨설팅하려면 우선 알아야 하니까요."
"....볼 거 다 봐놓고도 정식 절차를 밟자는 건가?"
"오, 에릭.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관계였잖아요. 우린 당분간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니까 당연히 정석대로 해야죠."


이쪽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는 장난기와 약간의 애정이 한 데 섞여서 반짝이고 있었다. 누가 들으면 둘이 사귀는 줄 알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실제로도, 여기저기에서 둘을 힐끗거리거나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시선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일단 나가지."
"그러는 게 좋겠어요. 여긴 쓸데없는 소문이 잘 나는 카페라서."   


찰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고, 에릭도 그 뒤를 따랐다. 노래하는 듯한 가벼운 걸음걸이와, 무뚝뚝한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지더니 이내 카페 문을 나섰다.

  
by 치우타 2011. 11. 13.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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